금속활자기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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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기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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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는 활판인쇄를 하기 위해 쇠붙이를 녹여 주형에 부어 만든 각종 크기의 활자이다.
금속활자는 활자를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의 성질에 따라 석활자(錫活字), 연활자(鉛活字), 동활자(銅活字), 철활자(鐵活字)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속활자라고 하면 그 재료가 어떤 금속이든 금속성이 있는 재료로 만든 활자를 총칭하는 것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다. 고려시대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과 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려 문종연간(1047∼1083) 기원설, 숙종 7(1102)년 기원설, 예종 15(1120)년 기원설, 충열왕 23(1297)년 기원설, 고종 19(1232)년 이전 기원설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문종연간 기원설

고려 문종 연간(1047∼1083) 기원설은 김부식이 서(序)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명(碑銘)에 나타나는 "흥왕사(興王寺)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고 명류들을 불러 오류를 간정(刊正)할 것을 청원하여 연참(鉛塹)을 주상(奏上)하니, 1년도 채 못되어 문적(文籍)이 크게 완비되었다"는 문장에서 "오류를 바로잡아 판각한다"는 의미의 연참연판(鉛版), 연활자판(鉛活字版), 금속활자판(金屬活字版) 등으로 확대 해석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이다.

숙종조 기원설

숙종 7(1102)년 기원설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숙종 7(1102)년 12월의 "이제 비로소 고주법으로 필요한 주전(鑄錢) 1만5천관(貫)을 만들어 재추(宰樞)·문무양반·군인 등에게 나누어 주어 그 권여(權與)로 삼고자 하는 바, 그 전문(錢文)을 해동통보(海東通寶)라 할 것이다"라는 기록을 근거한 것이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고려 복활자의 금속성분이 구리 50.9%, 아연 0.7%, 주석 28.5%, 납 10.2%, 철 2.2% 등으로 합성되어 있어 해동통보의 금속성분과 거의 같다는 데에서 해동통보를 만들 때 동과 철 등의 금속을 녹인 방법인 고주법을 임의적으로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고주법으로 간주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이다.

예종 15(1120)년 기원설

예종 15(1120)년 기원설은 종래의 학설로 15세기 전반기의 활자본인 「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의 책끝에 있는 2개의 장서인(藏書印) 중의 하나를 이녕보장(李寗寶藏)으로 잘못 판독함으로써, 그가 고려 인종 2(1124)년에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송 휘종(徽宗)에게 <예성강도(禮成江圖)>를 바친 인물이라는 점에서 금속활자 주조기술의 발달상태와 활자발명의 시기로 보아 잘 맞는 사람으로 판단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이다.

충열왕 23(1297)년 기원설

충열왕 23(1297)년 기원설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청량답순종심요법문(淸凉答順宗心要法門)」(5장)의 책끝에 간행자로 나타나는 별불화(別不花)라는 중국인이 고려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 무왕(武王)을 옹립한 사실이 있고 그가 충열왕 23(1297)년 무렵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서적이 충열왕 23(1297)년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이다.

고종 19(1232)년 이전 기원설

고종 19(1232)년 이전 기원설은 주자본(금속활자본)을 중조(번각)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의 책끝에 나타나는 "이에 공장들을 모집하고 주자본중조하여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기해(1239)년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이는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중조본의 경우 몽고군이 침략해와 강화도로 천도한 기해(1239)년 9월에 중조한 것이므로, 중조의 원본이었던 금속활자본은 강화도로 천도하기 전에 이미 개경에서 간행되었던 것임을 시사하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중조한 때가 고종 26(1239, 기해)년, 고려 정부가 몽고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때가 고종 19(1232)년 6월, 최이가 진양공에 책봉된 때가 고종 21(1234)년이었으며, 정황적으로 피난처인 강화도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점을 감안하면「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본은 강화도로 천도하기 전에 개경에서 간행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본은 고종 19(1232)년 6월 이전에 개경에서 간행되었을 것이라는 기원설이다.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 발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와 실물을 기다려 더욱 신중하게 연구되어야 하겠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 볼 때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 발명의 기원설은 고종 19(1232)년 이전 기원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학설인 것이다.

이상의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 발명의 기원설들을 중심으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신인상정예문발미 대진양공행(新印詳定禮文跋尾 代晋陽公行)조에 나타나는 기록을 비롯하여 금속활자본 「직지」 권말의 간기에 나타나는 기록, 정도전의 「삼봉집」 치서적포시병서조에 나타나는 기록, 「고려사」 백관지의 서적원에 관련된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은 고려시대 말기에 이미 실용되고 있었음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금속활자인쇄가 계속하여 행하여진 결과 공양왕 4(1392)년에 활자인쇄출판업무를 전담하기 위한 서적원(書籍院)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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