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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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은 인간의 정신적인 사고를 문자나 기호 등을 사용하여 일정한 형식의 서사재료에 기록한 저작물이다. 광의로는 <문자나 기호 등에 의해서 전달되는 모든 기록정보>를 의미하며, 협의로는 <기록정보 가운데 각 학문분야에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기록자료>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록자료의 본질적인 의의는 그것이 지니는 지적인 내용 또는 정보에 있다. 궁극적으로 기록자료는 종이나 기타의 서사재료에 문자나 기호 등의 공통의 상징을 통해서 정보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하여 타인이 그 정보를 해득하게 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서적을 "인류가 이룩하고 생각하고 보존해 온 모든 것"이라고 했고 헤인즈(Helen E. Haines)는 서적을 "지성의 그릇"이라 하였다.

서적을 구성하는 주요한 3가지 요소는 문자·서사재료·필기구 등이다. 인류는 일찍부터 이들 3가지의 요소들을 활용하여 서적을 생산하여 왔다. 초기에는 도형이나 추상적인 회화의 형태로 기록되었던 인간의 기록은 문자가 제작되어 사용되면서 기록의 수단도 점차로 문자를 위주로 발달하게 되었다.

상고의 서적

중국에서 문자시대가 시작된 것은 늦어도 상(은)대부터였다. 상대는 노예제 사회였으나 이미 국가가 형성되었고, 문자기록의 중요성도 인식되고 있었다. 통치자들은 일상업무를 편리하게 처리하고 백성들을 통치하는데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언행을 기록해서 후일의 참고자료로 삼았다.

사관은 이러한 문자기록을 담당한 지식인들의 계급이었다. 사관의 직책은 당시의 정치에 관한 중대한 사건과 통치자들의 언행을 기록하는 일을 관장해 왔으며, 이러한 기록을 보관함과 아울러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현존하는 상고의 문자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이 상대후기의 갑골서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서주(西周) 및 춘추전국시기에 각 국에 있었던 청동명문서가 있다.

갑골서

중국에는 상대에 이미 문자와 사관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당시 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문자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이 갑골복사(甲骨卜辭)이다. 복사는 상대의 제왕들이 점을 친 기록이다. 이 기록이 귀갑(龜甲:거북의 등껍질)이나 수골(獸骨:동물의 뼈)에 새겨졌으므로 「갑골문」이라고도 하였다.

갑골문의 내용은 점을 친 시기와 원인 및 길흉의 징조를 나타낸 것이었다. 당시는 신권을 중시한 사회였기 때문에 왕의 거동은 물론 국가의 큰 일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사전에 점을 쳐서 행하였다. 복사의 내용은 국가의 정치, 전쟁, 수렵, 농업, 목축 및 왕의 질병, 제사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기록되어 당시의 사회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기록을 일반적으로 갑골문·갑골복사·은허문자라고 한다. 갑골문의 발견지점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용골이라 하여 칼로 깎아 상처의 약으로 바르기도 했다. 갑골문은 그 재료의 성질상 반드시 칼로 새겨야만 했으므로, 갑골 그 자체가 서적을 만드는 재료로써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동기 명문서

청동은 동과 주석의 합금으로서 상대 후기에 이미 사용되기 시작하여 전한 때까지 계속 사용되어졌다. 청동기는 원래 식기·취사기구 등 일상생활의 기구로는 물론 악기나 병기에도 사용되었으며 상대 후기에 이르러 귀갑·수골 등과 마찬가지로 서사재료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청동기를 소유했던 귀족들은 이를 중시하여 기물의 표면에 자기의 이름이나 기물을 만든 시기와 원인 등을 주조하거나 새겨 넣기도 하였고 장기적으로 보존의 가치가 있는 주요한 문건이나 문서 등은 물론 영원토록 기념할 주요한 사건이 있을 경우에는 기물을 주조하고 그 표면에 이들 내용을 새기거나 주조하였다. 이러한 문자를 명(銘)이라고 했으며 후인들은 이를 금문(金文) 또는 종정문(鐘鼎文)이라고 하였다.

명문의 길이는 처음에는 1·2자에 불과했으나 후대에 와서는 점차 늘어나 4·5백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동서(靑銅書) 그 자체는 서적이라 할 수 없으나 후대에 정식의 서적을 이룰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죽 · 백서

죽간목독서

갑골서와 청동기 명문서의 뒤를 이어서 나타난 최초의 서적제도가 죽간(竹簡)과 목독(木牘)이었다. 죽간은 죽편을 사용한 데에서 유래된 명칭이며, 목독은 목편을 사용한 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이들 양자를 합칭하여 간독(簡牘)·목간(木簡)·죽목서(竹木書) 등으로 일컫는다. 죽과 목은 중국에서 가장 일찍 사용된 본격적인 서사재료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서적의 제도가 전통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심대했다. 한자를 종서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는 방법이나 심지어 종이가 발명된 이후의 서적의 단위, 용어 및 행격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죽간과 목독에서 유래된 것이다.

죽과 목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뿐 아니라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널리 쓰였을 만큼 가장 보편적인 서사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중국의 특산품이었으며 가장 싼값으로 풍부하게 공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좁고 긴 1매의 죽판을 간(簡)이라 하였으며 보통 1행으로 문자가 쓰여졌다. 글자수가 많을 경우 수매의 간에 써서 끈으로 연결하였는데 이것을 책(冊) 혹은 책(策)이라고 하였다. 책(冊)은 비교적 짧고 구체적인 기록에 사용되었으며, 내용이 비교적 길고 몇 책을 포괄한 문장의 단위에는 편(篇)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죽간은 주로 경적이나 장편의 내용에 쓰여졌으나 경적, 법률, 국사 등에는 장간이, 전기와 제자서 등에는 단간이 쓰였던 것이 통상의 제도였다. 목독은 장편의 전적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주로 공문서, 법령, 간단한 전달, 사신 등에 쓰였으며 간혹 그림에도 쓰여졌다.

죽간목독에 문자를 서사할 때는 상고에는 먹 대신에 칠(漆)을 사용하였고 중고에는 석먹액을 사용하였으며 위진 때에 이르러 비로소 먹환(墨丸)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만약, 서사된 문자에 오자가 있을 경우에는 도각을 거쳐서 다시금 서사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를 필삭(筆削)이라 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을 편련하는 데에는 실(絲)이나 가죽(韋)이 사용되었으며 실로 편철한 것을 사편(絲編), 가죽으로 편철한 것을 위편(韋編)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은 서적의 제도는 상대에서 쓰이기 시작하여 춘추시대에 성행되었으며 진·양한대에도 계속해서 사용되었으나 전한 때부터는 백서와 후한 때부터는 지서와 병용이 되다가 후에 점차 지서로 대체되었다. 죽간과 목독은 갑골이나 청동기보다 서사가 쉽고 가격이 저렴한 장점이 있기는 했으나, 무겁고 휴대와 대량의 수장이 불편하며 편련된 죽간이 탈락되면 유실되기 쉽다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백서

죽간과 목독이 성행되고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과도적으로 쓰인 서적의 제도가 백서이다. 비단은 상대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주대 초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으나 당시에는 주로 의복의 재료나 교역의 통화로써 사용되어졌다. 그 후 전국·한대 초기에 이르러 복잡한 문양이 있고 정미(精美)한 비단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되면서 서사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서의 제도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4장, 폭이 2척 2촌이었으며 비단에 글을 쓸 때에는 글의 장단에 의하여 수시로 재단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제도였다. 비단에 글을 다 쓰고 나면 이것을 말(捲)아서 보관하게 되는데 이를 권(卷)이라고 했다.

현대에도 서적의 단위에 권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비단은 넓은 서사면을 가진 장점이 있었으나 고가였기 때문에 죽간이나목독에 비하여 특수하게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이에따라 비단은 주로 유교경전, 점복(占卜)·점성(占星)에 관련된 서적, 선조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을 때의 기록문서, 황제나 황실 귀족의 언행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고자 할 때에 사용되었으며, 간혹 빛나는 무공을 세운 영웅의 공적을 영구히 기록하는 데에도 사용되어졌다.

비단의 특성은 유연하고 가벼우며 내구성과 흡습성이 있어서 대나무나 나무보다 서사재료로서는 훨씬 장점이 있었다. 또한 표면이 백색이기 때문에 글씨가 분명하고 가벼워서 휴대와 보관이 쉽고 부피가 적어서 죽이나 목보다 대량으로 수장할 수 있음과 동시에 서사가 용이하며 수시로 재단할 수 있고 폭이 넓어서 도화를 넣기가 쉬운 장점이 있다.

반면에 고가이며 생산이 적어서 대중에게 보급이 되지 못했고 귀족과 문인들의 사치용품이어서 간독에 완전히 대체되지 못한 단점이 있다.이로 인해 전국시대 이후부터 육조까지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후한에 이르러 종이가 개량된 후로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수·당 이후에는 예술적인 회화나 서예의 재료로 쓰였을 뿐 보편적인 서적의 서사재료로는 쓰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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