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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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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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상절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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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자는 세종 29(정묘, 1447)년 무렵에 만들어진 청동활자로 월인석보 한글자라고도 한다. 자체는 강직하고 굵은 고딕인서체이다.

활자는 대자와 소자로 주성되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으며, 크기는 대자 1.2X1.4㎝, 소자는 1.2X0.7㎝이었다. 조립식 인판틀을 이용하여 간행하였으며, 인본으로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이 있다.

「석보상절」은 세종 28(1446)년 10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7개월 앞선 3월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서거하였는데, 왕이 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어 정음으로 번역케 한 것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친히 보시고 문득 읊으신 국한문 찬불가이다.

이들 서적을 인출하기 위해, 한자활자는 갑인자의 대자와 소자를 사용하고 정음의 대자와 소자는 새로이 한글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이다.

활자의 주조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석보상절」이 세종 29(1447)년 9월에 편찬되었으므로 이 활자도 그 무렵에 주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한글활자의 대자는 고딕인서체로, 소자는 세필인서체로 되어 있다. 활자는 정교하여 어느 것이나 그 모양이 정연하며, 특히 둥근 획이 똑같고 가지런하다.

한글활자의 대자는 한자활자 소자보다 크고 굵어 압도하는 느낌이 있다. 이 한글활자는 세종이 우리 글을 창제하고 최초로 주성한 금속활자인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을해자 병용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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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두공부시 권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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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자 병용 한글자는 세조 7(1461)년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능엄 한글자라고도 한다. 세조는 불전의 국역 간행을 위하여 그 예비과정으로 을해자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불교경전을 인출해 냈다.

세조 7년 9월에는 「능엄경」을 국역하여 「능엄경언해」를 간행하였는데, 이 때에 새로이 한글활자가 주성되어 사용되었다. 활자는 0.9X0.6㎝의 소자로 자수는 알 수 없으며, 자체는 초기의 강직한 인서체에서 부드러운 필서체로 옮아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을유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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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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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 한글자는 세조 11(을유·1465)년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정난종자라고도 한다. 세조가 원각사를 준공하고 난 뒤 바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을 간행하기 위하여 정난종의 글씨를 자본으로 주조한 것이다.

활자는 본문을 위한 한자활자와 구결을 달기 위한 한글활자 함께 주성하였다. 을유 한글자는 소자만 만들어졌으며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의 크기는 소자 1.0X0.7㎝이었으며, 자체는 편편하고 대체로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을유자는 글자체가 부정하다 하여 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갑진자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 썼지만, 세조조에서 우리나라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주성한 마지막의 독자적인 금속활자라는 점에서 금속활자인쇄사상 지닌 의의가 크다.

을해자체 경서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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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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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자체 경서 한글자는 「소학언해」, 「대학언해」, 「중용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의 국역본 사서와 「효경언해」 등의 국역본 경서를 인출하는데 사용된 활자로 방을해자라고도 한다.

을해자체 경서 한글자는 을해자체를 닮게 주조한 것은 틀림없으나, 을해자 보자판과 다른 점은 마멸된 원래 활자가 없고 완전히 새로 주조된 활자로 인출한 점이다. 이 활자는 을해자의 둔탁한 필획과 강희안 필적의 특징이 짙게 나타나는 둥근 필의에서 벗어나, 자획이 가늘고 예리하여 둥근 필의가 다소 누그러진 단정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 활자가 언제 어떤 이들이 주관하여 주조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2X1.4㎝, 소자 1.0X0.6㎝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먼저 간행된 「소학언해」 권말에 붙은 이산해의 발문에서 선조 18(1585)년에 교정청을 열고 그 다음 해인 선조 19(1586)년 여름에 임금이 교서관(운각)으로 하여금 수백 부를 인출하도록 하명하였다고 한 점에서 활자의 주조는 선조 19(1586)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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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언해 권13~14
원종자로 인쇄

원종 한글자는 숙종 19(1693)년에 인조의 부왕인 원종(1580∼1693)이 쓴 글자를 바탕으로 주성한 동활자이다. 활자의 자수는 한자활자를 포함하여 4,605자였으며, 활자의 크기는 대자 1.2X1.1㎝, 소자 1.0X1.0㎝이었다.

활자의 주조가 정교하여 원종의 예리한 필서체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한글활자도 인서체에서 필서체로 바뀌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전사자 병용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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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어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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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병용 한글자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오빠 박종경이 순조 16(1816)년에 청나라 무영전취진판 「이십일사」의 글자를 자본으로 주성한 인서체 동활자로 돈암인서체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0.9X0.6㎝이었으며, 활자의 자수는 한자활자를 포함하여 20만자였다. 전사자는 일가와 친지의 저서를 인출해 주고 그대로 두었다가 철종 연간에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민간의 서적을 인출하여 주었다. 대원군의 집정 때에는 운현궁에 몰수되었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는 다시 이곳저곳에서 민간이 필요로 하는 서적의 간행에 사용되었다.

이 활자는 왕실의 외척이 일가와 친지의 저서와 문집을 인출하려고 만든 것이었으나, 뒤에 민간이 필요로 하는 서적들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시민문화와 시민의식의 계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활자의 모양이 신연활자와 같이 균정하고 크기가 적당하여 민간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재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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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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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는 철종 9(1858)년에 한자활자와 함께 주성된 동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0X0.9㎝이었다. 활자의 자수는 한자활자를 포함하여 89,203자였다. 활자주조의 정교한 정도는 물론 활자의 모양이나 자획의 박력도 초주 정리자에 비하여 떨어지나, 다른 활자에 비하여 글자체가 보기 좋고 활자의 크기가 적당한 인서체였으므로, 구한말까지 학부의 교과서·법령·조약서·관보 등 정부인쇄물 간행에 주로 사용되었다.

현재 재주 정리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간직되어 있으며, 뒷면이 임진자와 현종실록자 및 삼주 한구자와 같이 옴푹 파져 있다. 동의 사용량을 절약하면서 반건성이나 불건성의 점착물을 사용하여 판을 짤 때 그 점착물이 그 속으로 꽉 차서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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