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인쇄술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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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기원설

목판

목판인쇄술이 당대에 기원되었다는 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유빈(柳玭), 손육수(孫毓修), 섭몽득(葉夢得), 주이준(朱彛遵), 왕사정(王士禎), 섭득휘(葉得輝), 왕국유(王國維) 등이다.

[구당서] 문종 본기에 "태화(太和) 9(827)년 12월에 여러 도(道)와 부(府)에 칙령을 내려 일력(日曆)의 판을 사사로이 장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으며, 당의 유빈은 [유씨가훈(柳氏家訓)]에서 "중화(中和) 3(883)년 계묘 여름은 천자의 어가가 촉(蜀)에 있은 지 3년이 되던 때였다.

나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어 10일간의 휴가를 얻게되자 중성(重城)의 동남에서 서적을 열람하였던 바, 그들 서적은 대체로 음양·잡기·점몽·상택·구궁오위 등이었다. 또한 자서·소학 등도 있었던 바, 대체로 조판(雕版)하여 종이로 인출한 것이었으나 침염(浸染)은 한결같이 좋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손육수는 [중국조판원류고]에서 [개원잡보(開元雜報)]가 당대의 조본(雕本)이라고 소개하였다. 송의 섭몽득은 [석림연어(石林燕語)]에서 "세간에서는 조판인서(雕版印書)가 풍도(馮道)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으며, 풍도는 다만 감본(監本) 오경판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유빈가훈(柳玭家訓)] 서문에서는 그가 촉에 있었을 때에 일찍이 서사를 열방한 바 자서와 소학 등은 대체로 조판하여 종이로 간행한 것이었다고 하였으니, 당대에는 실제로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으나, 다만 오늘날의 공정과는 같지 않았던 듯하다"라고 하였다. 청말의 주이준은 [경의고(經義考)]에서 송의 [국사지(國史志)]를 인용하여 "당조 말기에 익주(益州)에 처음으로 먹판(墨版)이 있었으니 대체로 술수·자서·소학 등이었다"라고 하였다.

당·송 이래의 제가의 문헌과 섭득휘, 손육수 등의 논증 그리고 [중국판각도록(中國版刻圖錄)]의 "우리의 선조들이 오랜 기간의 연마를 거쳐서 8세기 전후에 이르러 또한 각판인쇄술을 등장하였던 것이다"라는 기록과 돈황(敦皇)에서 발굴된 각종의 실물들을 통하여 볼 때, 목판인쇄술은 당대에 등장되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며, 목판을 새기는 기술은 함통연간(咸通年間, 860-873)에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실물로는 함통 9(868)년의 '함통구년사월이십오일왕개위이친경조보시(咸通九年四月十五日王 爲二親敬造普施)'라는 간기가 있는 [금강경], 건부(乾符) 4(877)년과 중화(中和) 2(882)년에 각인된 역서(曆書), 당대에 각인된 [다라니경주(多羅泥經呪)]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목판인쇄술은 7·8세기에 등장되고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미 중국 전역에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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