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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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한자와 서적이 전래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상류계급의 자제들을 위해 태학을 설립하고 평민층의 자제들을 위해 경당을 설치하여 교육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에서는 국학을 설치하여 오경·논어·효경·삼사·문선·제자백가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과 서적에 관련된 서목(書目)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고려시대

고려는 국초에 비각(비서각)과 비서성을 설치하여 국내외의 문헌을 보관하였다. 궁궐 내에 설치된 비각은 왕실의 서적의 보존과 편찬 및 강학을 하는 곳이었으며 궁궐 밖에 설치된 비서성은 국가의 경적과 향축을 맡아보는 동시에 인서와 판본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궐내에는 왕실문고가 있었고, 궁내의 문신들이 강학하던 곳으로 문덕전(文德殿), 장령전(長齡殿), 중광전(重光殿), 연영전(延英殿), 임천각(臨川閣), 홍문관(弘文館), 문첩소(文牒所) 등이 있었다.

성종 9(990)년에는 서경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하고 서적의 보존을 위한 국가시책으로서 수서원의 유생들로 하여금 역대의 사적을 초사하여 간직하게 하였다. 또한 성종 11(992)년에는 국자감을 설치하여 상류계급의 자제들을 교육시켰으며, 여기에 필요로 하는 서적을 보급하기 위해서 서적포(書籍鋪)를 두고 서적을 발행하게 하였다.

인종 때에는 국립의 경사육학(京師六學)의 제도와 지방에 향학을 설립하였으며, 따라서 사학이 발달하여 12공도가 설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도 보편화되었으며 따라서 사찰의 수는 더욱 증가하여 개경에만 70여개의 사찰이 있었고 전국의 사찰을 합하면 수천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찰에서는 경판을 새기고 그 경판과 불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판각이나 장경각을 건립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개성의 현화사(玄化寺)와 흥왕사(興王寺),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符仁寺)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에서는 3차에 걸쳐서 대장경이 각판되고 간행되었다. 1차는 거란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불력으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각판된 것으로 현종조에 개성의 현화사에서 각판하여 현화사의 경판각에 보존되었으나 그 후 대구의 부인사로 옮겨서 보관되다가 임진(1232)년에 몽고병에 의하여 불타고 말았다.

2차는 문종조에 개성의 개국사(開國寺)·흥왕사·귀법사(歸法寺) 등에서 각판하여 흥왕사의 경판각에 보존되다가 그 후 해인사로 옮겨서 보존되었으며 다시 조선조 초기에 묘향산의 보현사로 옮겨서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차는 고종 때 몽고의 침입을 받아 왕실이 강화도에 피난 중 그 화를 불력으로 막기 위하여 강화의 선원사(禪源寺)에서 각판하기 시작하여 고종 38(1251)년에 완성된 것이다. 이는 조선조 초기까지 선원사에 보존되었으나 조선 태조 7(1398)년경 해인사로 옮겨져서 현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다.

한편 3차에 걸쳐 판각되고 간행된 대장경에는 정교한 목록이 편찬된 바 있었는데, 이들 3가지의 목록이 우리나라 서목의 기원이 되고 있다.

[초조대장경] 목록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판각목록으로 현종 2(1011)년에 착수하여 선종 4(1087)년에 이르러 일단락을 본 [대장목록]이다. 이 목록은 아직 출현되지 않고 있으나 [재조대장경]의 [대장경목록] 경함에 들어 있는 [대장목록]에 의해 그 내용과 체제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대장목록]은 북송 [개보칙판대장경]의 내용과 체제를 바탕으로 누락·일실·이역·오탈·착사된 것 등을 문종 17(1063)년에 들여온 [거란대장경]에서 취하여 편입 또는 대체시키고 있으며, 문종 37(1083)년에 새로 들여온 [송조대장경]에 대하여는 그 뒤에 추가의 형식으로 조조시키고 있다. 따라서 분류체제가 천함부터 영함까지는 개보칙판에 준거하여 보살삼장경(대승삼장록), 성문삼장경(소승삼장록), 성현전기록으로 구분 전개되고 있으나 [송조대장경]과 그 밖의 것에 의한 두함부터 초함까지의 것은 전혀 분류하지 않고 경전의 인본이 수입되고 판각되는 대로 추가로 편입되어 있다.

목록의 체제도 함차별 권수, 인지수 등의 표시에 이어 경전명과 권차, 역찬자(譯撰者)의 역조명, 승명(僧名), 역찬표시(譯撰表示) 등의 차례로 극히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분류체계가 갖추어지지 못하고 판각을 위주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으나, 당시 동양에서 엮어진 한역정장의 판각목록으로서는 그 규모가 포괄적인 것이었다.

[교장] 목록

교장의 판각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은 의천(1055∼1011)이 한역정장에 대한 동양 학문승들의 신구찬술과 소초를 판각하고자 송·요·일본 및 국내에서 두루 수집하여 선종 7(1090)년에 편찬된 목록이다. 내제는 [해동유본견행록(海東有本見行錄)]으로 되어 있으나 [의천록(義天錄)]으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총 교장 1010부 4857권이 상·중·하의 3권에 수록되어 있다. 분류는 경·율·논의 3부로 구분되고 있으며, 각 권에서는 주요한 경·율·논의 명칭 아래에 해당 장소가 수록되어 있다. 목록은 약서명·권수·찬술자의 차례로 약기하되 동일 찬술자의 것이 함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 서목은 동양 학문승들의 장소를 우리가 최초로 집성하여 판각하고자 편찬된 목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한역장경에 대한 제가 장소의 존부를 아는데 참고가 되는 서지자료이다.

[재조대장경] 목록

[재조대장경]목록은 초조의 경판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이 고종 24(1237)년부터 동왕 38(1251)년까지의 사이에 다시 조조한 판각목록이다. 이 목록은 대장경을 재조할 때 수기(守其) 법사가 철저하게 교정·검토하여 [초조대장경]에서 누락된 것과 이역·착사 등이 심한 것을 다시 더 추가 또는 대체하는 한편, 초조가 일단락된 이후에 들여온 [송조대장경]의 조조분을 추가시키고 그밖에도 대장도감이 필요하여 새겨낸 장소류와 승전류 등을 보유하여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분류와 목록의 체제는 [초조대장경]목록과 같으나 판각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으며, 그 내용은 해인사에 간직되고 있는 팔만대장경과 일치하고 있다. 이 목록은 판각목록인 동시에 경판의 점검용 함가목록으로서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이 그 특징이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에는 [보문각책목록(寶文閣冊目錄)] 등의 목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조선 태종은즉위 3(1403)년에 주자소를 새로 설치하고 동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인행하고 법전인 [원육전(元六典)]과 [속육전(續六典)] 그리고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을 편찬하였으며, 세종은 훈민정음을 제정하고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집현전은 역대의 귀중한 문헌들을 정리하여 수장하고 학사와 문헌사(文獻士) 등을 두어 국정시책에 필요한 제도·법률 등을 조사·연구하여 주로 왕의 자문에 응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술과 교육적인 이용에도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의 사방의 벽마다에 마련된 서가에는 경·사·자·집의 4부법에 의하여 분류된 서적이 정연히 배열되어 있었으며 목록도 마련되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집현전은 세조 2(1465)년에 폐지되고 세조 9(1463)년에 설치된 홍문관으로 그 기능이 이관되었으며, 홍문관은 또한 정조 때에 규장각으로 그 기능이 이관되었다.

조선시대 후반부에 만들어진 규장각은 역대의 귀중한 문헌들을 정리하여 수장하고 국정시책에 필요한 제도·법률 등을 조사·연구하여 주로 왕의 자문에 응대하는 도서관적인 기능을 겸하는 한편 많은 문헌을 편찬했으며, 경서와 사적을 인쇄·반포하므로써 조선후기의 문운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규장각의 산하에는 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열고관은 문헌열람실이고 개유와는 서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5(1781)년에 각신 서호수(徐浩修)에 의해서 [규장총목](4권 3책)이 편찬되었는데, 이 목록을 [열고관서목(閱古觀書目)] 또는 [개유와서목(皆有窩書目)]이라고도 하였다. 본 목록은 경·사·자·집의 4부법에 따라 편찬된 중국본 서목이다.

규장각의 장서는 홍문관·집옥재(集玉齋)·사고(史庫)·북한산행궁(北漢山行宮)·춘방(春坊) 등 왕실소속의 여러 장서와 더불어 14만여 책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대학도서관의 기능을 수행한 곳은 성종 6(1475)년에 설립된 성균관의 존경각(尊經閣)이다. 존경각에는 사서·오경 각 100질을 기본 장서로 하고 전국에 있는 서판(書版)을 인행하고 수집하여 수 만권에 달하였으나, 중종 9(1514)년에 실화로 소진되었다. 그 후 교서관·문무루(文武樓) 등의 문헌과 명나라로부터 구입한 문헌 등으로 보충하고 복원한 장서가 현재의 존경각에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원이 많이 설립되었으며, 이러한 서원에는 문헌을 소장하는 서고가 있었다. 이러한 문헌들을 근거로 편찬된 목록이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이었다.

[고사촬요] 책판목록

[고사촬요(攷事撮要)] 책판목록은 현전되고 있는 조선시대 책판목록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이다. 명종 9(1554)년에 어숙권(魚叔權)이 당시 팔도의 각지에 간직되어 있는 책판을 조사하여 그 약서명을 [고사촬요]의 <팔도정도>에 함께 수록한 것이다.

본서에 수록된 책판의 판각시기는 조선조 초기까지 소급되나, 15세기 후반기에서 16세기 전반기에 판각된 책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무렵의 지방판본을 고증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이 책판목록은 선조 1(1568)년, 동왕 9(1576)년, 동왕 18(1585)년에 각각 증보되어 새겨졌으나,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팔도의 책판이 병화로 거의 소훼 또는 인몰되었으므로 이를 삭제하고 진공방물로 대치하고 있다.

[고책판소재고]

[고책판소재고(古冊板所在攷)]는 임진왜란 이후 세태가 안정되자 팔도의 각지에서 학문 및 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비롯하여 관서용의 자료와 민간에서 일용할 여러 서적이 다시 개판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책판이 목록으로 편찬된 것이 영조조의 [고책판소재고]이다.

본서는 숙종조에 편찬된 [해동지지(海東地志)]에서 경기·충청·전라·강원·황해·함경 등 6도의 책판을 전재하고, [해동지지]에서 빠진 영남의 책판은 [영남책판기(嶺南冊板記)]에서 옮겨 적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사한 것이었다.

[해동문헌총록]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은 김휴(金烋·1597∼1640)가 인조 15(1637)년에 주로 여러 자료에서 기록을 조사하여 학문 전반 또는 특정 주제분야의문헌을 체계적으로편성한 문헌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의도적으로 편성한 문헌중심의 저록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최초의 것이다.

편찬자는 임진왜란 이후 세력을 잃고 기울어진 남인 가문의 출신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대작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승인 장현광(張顯光)의 교시에 따라 낙동강을 중심한 동서남북 지방의 명문대가를 일일이 방문하는 한편 여러 고전자료에서 기록을 두루 섭렵하여 서목을 찬술하였다.

수록범위는 신라시대에서 조선중기 무렵까지의 서적이 포괄되어 있으며, 분류법에 있어 같은 주제가 흩어진 점이 단점이나 동양에서 관용해온 분류법을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개한 분류법을 채용하고 있는 점은 그 특징이다. 목록의 체제는 서명을 표출하고 다음 행부터 찬자, 약전, 해제 및 서·발문 등을 초록하여 인용한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연려실기술]별집문예전고

이긍익(李肯翊·176∼1806)의 [연려실기술별집(燃藜室記述別集)] <문예전고(文藝典故)>는 여러 문헌에서 기록을 조사하여 편성한 문헌서목이다. [연려실기술]은 우리의 국사관계자료 600여종을 섭렵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로 엮은 기사본말체 사서이다.

<문예전고>의 내용은 학문, 문장, 필법, 화가, 서화가, 족보, 주자, 언해, 여지승람, [경국대전], 예서류, 문집, 야사류, 병서류, 역가류 등이며 그 중 학문 이하에서 [경국대전]까지는 문장형식의 기술이고 예서류 이하에서 역가류까지는 문장형식과 서목형식이 절충되어 있다.

그리고 기술에 있어서는 근거한 자료를 일일이 문장 또는 서목 끝에 표시하고 있어 원전에로의 인도는 물론 서지작성의 신빙성을 보여 주고 있다. 수록범위는 광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기술과 문장의 말미에서 밝힌 616의 출처는 한국사연구에 유용한 서지자료이다.

[삼남책판목록]

[삼남책판목록(三南冊板目錄)]은 영조 35(1759)년에 전라·충청·경상 등의 삼남지방에 소장된 책판에 약간의 함경도 책판이 추가된 책판목록이 편찬되었다. 주로 [삼남책판목록]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첫머리에 완영(完營)에서 개판된 책판이 수록되고 있는 점에서 [완영책판목록]이라고도 한다.

이 목록은 그 뒤 정조 15(1791)년에 다시금 조사되어 [오거서록(五車書錄)]으로 개제되기도 하였다. 책판의 상태가 면밀히 조사되어 있어 인지수(印紙數) 및 서적의 상태와 아울러 고찰하면 간행연도의 표시가 없는 지방판본의 개판연대 추정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규장각의 장서목록

[규장총목(奎章總目)]은 규장각의 각신 서호수(徐浩修)가 정조 5(1781)년에 열고관(閱古觀)에 소장된 중국본을 정리한 [열고관서목]과 서서(西序, 西庫)에 소장된 한국본을 정리한 [서서서목]을 합쳐 [규장총목]이라 하였던 것이다.

중국본은 수장량이 많아 열고관의 북쪽에 붙여 개유와(皆有窩)의 건물을 증축·확장하고, 그 중국본을 정리한 것이 [개유와서목]이다. 그 중 오늘에 전해지는 것은 규장각 소장의 [개유와서목] 뿐이고, 구 장서각 소장의 [열고관서목]은 순조 말기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전존본을 보면 전자는 4부법의 유문별로 서명에 이어 부수를 적고 그 다음 행부터 찬자·약전·해설 등의 차례로 기술한 정식의 해제 장서목록이고, 후자는 4부법의 유문별로 서명·권수·찬자 등을 간단히 적은 약식의 장서목록이다.

한국본을 정리한 [서서서목]은 초찬본이 전해지지 않고 그 후에 약식으로 작성한 서가부록(書架簿錄)만 3종이 전래되고 있다. 그 첫째는 정조 13(1789)년 이후에 작성된 규장각 소장의 [서고장서록]이고 그 둘째는 정조 16(1792)년 무렵에 작성된 [서서서목첨록(西序書目籤錄)]이며, 그 셋째는 정조 19(1795)년 무렵에 작성된 [서서서목초본(西序書目草本)]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장서는 그 뒤에도 다시금 점검을 통하여 서목이 작성되었는데, 현존하는 [규장각서목(奎章閣書目)] 3책은 고종시대에 편찬된 것이다. 그 내용은 제1책이 [이문원서목( 文院書目)], 제2책이 [서고서목(書庫書目)], 제3책이 [열고관서목(閱古觀書目)]이다.

[누판고]

정조 20(1796)년에 중앙 및 지방관서 이외에 사사기관까지 철저하게 조사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편찬된 책판목록이 [누판고]이다. 본서는 규장각의 각신 서유구(徐有榘) 등이 조사하여 편찬한 것으로 중앙관서의 장판에는 교서관, 주자소, 봉모당, 내부, 종부시, 관상감, 사역원, 혜민서, 장악원, 군기시, 훈련도감 등의 책판들이 수록되고 지방관서의 장판에는 경기, 호서, 호남, 영남, 해서, 관동, 관서, 관북 등의 관찰영과 각영 소속의 부, 목, 군, 현 등 관서의 장판이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사사기관의 장판에는 서원, 사궁(祠宮), 사찰 및 사가의 책판들이 수록되어 있다. 분류는 어찬과 왕명에 의해 편찬된 어정서를 앞에 별치하고 그 다음에 경사자집의 4부법으로 체계화하였으며, 목록은 서명·권수의 표출에 이어 다음 행부터 편찬자, 약해, 장판, 인지수 등의 차례로 기술하고 있다. 본서는 어느 책판목록보다도 권위가 있고 신빙성이 있으며 또한 그 편성의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다.

[군서표기]

[군서표기(群書標記)]는 정조조 일대의 관찬서를 저록한 서목이다. 본 서목은 정조의 시문(詩文)·윤음(綸音)·교서(敎書)·유서(諭書)·돈유(敦諭)·봉서(封書)·책문(策問)·행장(行狀) 등을 비롯한 각종의 저술을 총집하여 순조 14(1814)년에 정리자로 간행한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권179∼184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었던 영조 48(1772)년부터 정조 24(1800)년까지의 사이에 편찬·간행·반사한 관찬서를 수록한 것이며, 그 분류는 크게 어정서와 명찬서 등으로 구분한 다음 그 편찬의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 중 어정서는 [누판고]·[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채택한 어정서와는 달리 정조가 춘저 때부터 친히 편찬한 어정서를 일컫는 것이다.

저록의 체제는 서명을 표출하고 이어 권수·간사구분 등을 표시하고 그 다음 행부터 내용의 개략, 편찬의 경위 및 득실, 서·발문의 초록인용, 간인 및 번각 등이 기술되고 있다. 특히 간인사항에 있어서는 인출에 사용된 활자명까지 명시되고 있어 인본의 식별에 크게 도움이 된다.

[증보문헌비고] 예문고

홍봉한(洪鳳漢) 등이 영조 46(1770)년에 왕명으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이만운(李萬運) 등이 정조 6(1782)년에 중수하고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로 개제한 것에 또다시 홍문관 학사들이 광무 11(1907)년에 대폭 증수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로 고쳐 융희 2(1908)년에 간행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의 문물제도를 집대성한 서적이며 그 중 권242∼250에 예문고(1∼9)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역대서적, 역대저술, 사기, 어제, 열조어정제서, 유가류, 전장류, 문헌류, 고실류(故實類), 잡찬류, 상위류, 여지류, 병가류, 자서류, 초집류, 역설류, 의가류, 농가류, 석가류, 문집류 등으로 분류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분류체계를 구축한 점이 그 특징이다.

그 중 역대서적의 유문에서는 중국 각 역조의 저술과 편찬을 우리나라가 수입·장거·전사·간행·국역한 것 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가 중국에 진서한 것과 중국인이 우리나라에 관하여 저술한 문헌 등이 시대순으로 기술되어 있고, 역대저술의 유문에는 우리나라 각 역조의 한국인저술이 시대순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 다른 서목에 비하여 다른 점이다.

그 체제는 문장형식과 서목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그 중 문장형식에는 근거한 자료에서 문헌에 관한 원문을 전재하고 간혹 안설(按說)까지 붙이고 있다. 서목형식에는 서명의 표출에 이어 권수·찬자의 표시 등과 같은 약식체제가 아니면, 찬자의 약전과 내용의 약해가 더 첨가되어 있다.

[해동역사] 예문지·경적

[해동역사(海東繹史)] 예문지(藝文志)·경적(經籍)은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여러 문헌의 기록을 조사하여 편찬한 서목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사료가 아닌 중국사료 523종과 일본사료 22종을 참고하여 실학적 안목으로 엮고 안설까지 붙인 점이 특징이다. 예문지·경적의 내용은 총론·본국서목·중국서목으로 구분되어 있다.

총론은 서적 전반에 걸친 사항을 대체로 시대순에 따라 기술하고 본국 및 중국서목은 문헌을 각각 경사자집의 4부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중 중국서목에는 외국인에 의한 동국기사류가 부재되고 있어 크게 참고가 된다.

문헌에 수록된 기록을 중심으로 엮었기 때문에 저록의 종수는 많지 않으나, 이들 저록을 통하여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정조년간에 이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동양 삼국간의 전적유통, 학문의 전파, 전적문화사정 등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서목을 위시하여 권수의 참고문헌과 각 문장의 말미에 표시된 출전은 매우 긴요한 서지자료이다.

[홍씨독서록]

[홍씨독서록(洪氏讀書錄)]은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4부의 서적을 독서하고 경사자집의 유문별로 서명·권수·찬자 그리고 내용을 약해한 4권본 서지자료이다.

[제도책판목록]

[제도책판목록(諸道冊板目錄)]은 헌종 6(1840)년에 함경도를 제외한 7도에서 개판된 책판을 조사하여 편찬한 것이나 혹은 [각도책판목록(各道冊板目錄)]으로 제목한 경우도 있다. 편성의 체제가 [누판고]에 비해 사뭇 간략하나, 장판을 자세히 조사하여 신간·완전·구간·완결·파손 그리고 관판·사판 등의 구분을 표시해 주고 있어 지방판의 서지적 고증에 크게 도움이 된다.

[동국통지]

[동국통지(東國通志)]는 박주종(朴周種)이 우리나라의 제도·연혁 등에 관하여 중국의 [한서], [신당서], [원사] 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고려사], [해동역사] 등을 모방하여 [원사]와 [고려사]의 체제에 가깝도록 편찬한 것이다. 그 중 예문지에는 기자조선을 상한으로 조선조 순조를 하한으로 하는 총 2,161종의 서목이 저록되어 있다.

4부법을 탈피하고 대폭적으로 개수하여 도합 22유로 전개시키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인들의 저술을 모아 <화사기술류>의 독특한 유목을 두고, <어제서>와 <역가류> 등의 유목도 두고 있다. 이는 방대한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편찬하였다는 점에서 주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집현전책목록(集賢殿冊目錄)], [홍문관책목록(弘文館冊目錄)] 등의 목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근·현대

[조선서지]

[조선서지(朝鮮書誌, Bibliographie Coreenne 3v. Supplement IV)]는 고종 때 우리나라에 와서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한 바 있는 모리스 쿠랑(Mourice Courant 1865∼1935)이 자기가 조사한 우리나라 고서를 비롯한 다른 프랑스인들이 수집해 간 여러 장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방서(訪書)한 것에 의거하여 독자적인 주제체계로 엮은 서목이다.

그 내용은 9부문 35류이며, 각 문헌에는 프랑스어로 해제가 붙어 있다. 권수에 있는 장문의 서론에는 한국전적의 성격과 특징을 언급한데 이어 언어·문자와 유불도의 종교사상을 비롯하여 역사·지리·전례·정법·수학·천문학·병법·의술·점성술·예술 등의 학예와 문학을 문화사적 시각에서 개관하고 있다. 비록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서구인으로서 방대한 서지를 엮고 그것을 통해 우리문화 전반을 논평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고선책보]·[선책명제]

[고선책보(古鮮冊譜)]는 대한제국 때 조선공사 통역관으로 내한한 바 있는 일본인 마에마 고사꾸(前間恭作)가 1904년경부터 1942년까지 30여년간 수집한 장서를 비롯하여 한국·일본·만주지방의 여러 장서 그리고 각종 문헌을 조사하여 엮은 서목이다.

편집에 있어서 형식의 통일이 결여되고 해제의 상략이 심하며 배열이 일본어순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까지 나온 우리나라의 서목 중에서 가장 방대한 것이었다. 특히 해설에 저자경력의 대요, 서·발문, 장판, 인용전거 등 필요한 서지사항을 광범하게 초록하고 인용하여 기재하고 있어 많이 활용되고 있다. 편자가 엮은 서목으로 [고선책보]의 자매편격인 [선책명제(鮮冊名題)]가 있다.

본서는 미완성 수고의 유별서목으로 전래되고 있으나, 독특한 유별순으로 정리되어 있어 고전자료의 조직에 적용된 분류법 연구에 참고가 된다.

[영남각읍교원책록]

[영남각읍교원책록(嶺南各邑校院冊錄)]의 작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내용으로 보아 근세에 조사하여 엮은 것이다. 그 내용은 향교는 하나 뿐이고 모두가 경주부, 안동부, 상주부, 성주목 관내에 있는 서원의 간략한 장서목록이다.

[청분실서목]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은 이인영(李仁榮) 교수가 1944년에 편찬한 그의 가장목록으로 오늘날에도 후학들이 좌우에 상비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목록은 우리나라의 활자본, 목판본 및 초본 등을 임진왜란 전후로 구분하여 판종을 구체적으로 고증하여 간인년과 필사시기를 대체로 올바르게 추정하고 있다.

특히, 형태의 기술이 상세하여 시대적 변천에 의한 선본을 쉽게 식별해 낼 수 있게 되어 있는 점도 그 장점이다. 이 서목은 형태서지학에 조예가 깊은 구안자의 지식이 적용되어 있어, 목록다운 목록이 편찬되었음은 물론 목록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목록이었다.

[한국고서종합목록]

[한국고서종합목록(韓國古書綜合目錄)]은 윤병태 교수가 조사한 것을 토대로 국회도서관이 추가 보완하여(1968년) 한국의 고서를 가장 양적으로 집대성한 유용한 서지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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