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목활자

  • 직지와 인쇄문화
  • 인쇄출판의 역사
  • 목활자인쇄술
  • 한글목활자

한글목활자

  • 직지와 인쇄문화
  • 인쇄출판의 역사
  • 목활자인쇄술
  • 한글목활자

[동국정운] 한글자

[동국정운] 한글자는 세종 29(1447)년에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우리나라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간행하는 데에 사용된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7×1.1㎝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신숙주(申叔舟) 등 여러 학자들이 임금의 명으로 세종 29(1447)년 9월에 <훈민정음> 제정의 원리와 배경연구에 매우 긴요한 자료인 [동국정운]을 완성하자, 다음해인 세종 30(1448)년 11월에 목활자로 간행하여 각도를 비롯한 성균관 사부학당(四部學堂) 등에 반사하였다.

서문의 대자와 본문 대자에 운을 단 소자는 <초주 갑인자>의 대자와 소자가 사용되었다. 대자는 강직한 직선을 그어 결구한 고딕인서체로 <훈민정음>의 원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홍무정운] 한글자

[홍무정운] 한글자는 단종 3(1455)년에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간행에 사용된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7×1.1㎝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 잡고자 세종 29(1447)년에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당시 명나라에서 새로 엮은 [홍무정운]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사람을 요동에 보내어 정확한 음운을 결정하고 또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마다 중국음을 연구하였으나 세종 때 완료되지 못하고 문종 때의 교열을 거쳐 단종 3(1455)년에 [홍무정운역훈]을 간행하였다. 이 서적을 간행하는 데에 쓰인 한글대자와 소자를 <홍무정운 한글자>라 한다.

홍무정운자는 동국정운자를 방불케 하나 한글자는 강직한 직선의 인서체가 아니라 부드러운 필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한글 서체가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동국정운]으로 이어진 고딕인서체에서 벗어나 최초로 시도한 필서체라는 점에서 한글 서체 변화상 주목된다. 그러나 활자의 제작기법은 떨어지는 편이다.

인경 한글자

인경 한글자는 연군산 때에 불경을 간행해내기 위하여 한자와 함께 만들어진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0.9×0.7㎝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성종이 승하하자 대비들이 임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연산군 원(1495)년 원각사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간행하였으며, 목활자로 동일한 내용의 단일 발문을 작성하고 간행하여 모든 서적의 끝에 똑같이 붙였다. 다음해인 연산군 2(1496)년에는 임금이 내탕으로 불경간인 사업을 도와 목활자를 더 만들어 국역본 [육조대사법보단경]과 [진언권공(眞言勸供)]을 정교하게 간행해냈다.

이 목활자의 인본은 정현대비(貞顯大妃)와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가 주관하여 임금이 내린 내탕으로 정성껏 활자를 만들어 간행한 것이며 그 일을 실제로 맡아 진행시킨 이는 학조(學祖)였다.

서체는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이고 새김이 정교하여 활자모양이 단정하고 가지런하며, 인쇄도 먹색이 진하고 깨끗하여 인본들은 매우 정교하고 우아하다. 국역불서는 한글의 표기가 당시 한자음의 실제음으로 되어있어 국어학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훈련도감 한글자

임진왜란 직후 선조 27(1594)년 2월에 훈련도감이 설치되었으나 선조 30(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훈련도감의 운영은 난관에 봉착하여 양병의 유지가 매우 어려웠다.

그 결과 강구된 것이 훈련도감의 유휴병력을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어 교서관을 대신하여 서적을 간행해주고 실비를 받아 경비의 부족을 충당하는 일이었다. 당시 인쇄업무는 흩어진 옛 활자를 주워 모으고 부족한 것을 목활자로 보충하여 아주 긴요한 것만을 겨우 간행해내는 실정이어서 훈련도감에서 대대적인 인쇄사업을 실시하여 운영비의 일부를 충당하려는 것은 시의에 적절한 사업이었다.

훈련도감의 인쇄사업은 선조 말기부터 시작되어 광해군시대를 거쳐 인조 후기(17세기 전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훈련도감은 옛 활자의 글자체를 본뜬 각종의 활자를 나무로 만들어 다양하게 서적을 간행해냈다. 훈련도감 한글자의 크기는 대자 1.4×1.3㎝, 소자 1.1×0.7㎝이었으나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다.

훈련도감 한글자는 인쇄업무에 경험이 없던 병사들이 만든 것이라 글자모양이 바르지 않고 자획도 고르지 않으며 인쇄도 정교하지 못하여 조잡한 편이다. 그러나 인쇄업무를 관장하던 교서관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 그 업무를 대신 수행하여 문화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쇄문화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내의원 한글자

내의원 한글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41(1608)년부터 광해군 7(1615)년 사이에 내의원이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고 의관들이 의서를 엮어 철저하게 교정하고 감수하여 간행할 때 한자와 함께 사용되었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2×1.2㎝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의서는 다른 서적과 달리 작은 글자가 많아 약명과 처방에 조금이라도 착오와 오류가 생기면 목숨에 관계가 있으므로 외부에 맡길 수 없다는 데에서 선조 41(1608)년부터 광해군 7(1615)년까지는 내의원이 직접 맡아 감교하여 간행해냈다.

이 활자는 새로 의뢰하여 만든 듯 활자를 만든 솜씨가 당시의 수준으로는 정교한 편이며 인쇄가 매우 깨끗하다. 글자체는 을해자체를 닮은 것이 그 특징이다. 이 활자를 만든 곳은 훈련도감이며 내의원에서는 훈련도감의 활자를 빌려쓴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무신자 병용 한글자

무신자 병용 한글자는 현종 9(1668)년에 김좌명(1616∼1671)이 호조 및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이용하여 수어청에서 주성한 대자 66,100여자와 소자 46,000여자의 무신 동활자와 함께 사용된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3×1.1㎝, 소자 1.0×1.0㎝이었다. 인본으로는 [시경언해], [대학율곡선생언해] 등이 있다.

후기 교서관 인서체 한글자

후기 교서관 인서체 한글자의 정확한 조성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경종 초(1723 이전)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1.1㎝, 소자 0.9×0.5㎝이었다. 인본으로는 [증수무원록언해] 등이 있다.

[경서정음] 한글자

경서정음자는 영조 10(1734)년에 이성빈(李聖彬) 등의 역관이 사역원에서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의 사서(四書)와 [서전], [시전], [춘추] 등의 삼경의 역학서 원문에 대한 중국의 바른 음을 한글로 표기하여 간행하고자 스스로 경비를 거두어 만든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0×0.7㎝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이 목활자의 글자체는 갑인자체를 닮은 단정하고 유려한 진체(晋體)계의 필서체이며, 자본은 사주 갑인자인 무신자로 삼은 듯하다. 활자를 새긴 솜씨가 비교적 정교하여 인쇄가 깨끗하다.

임진자 병용 한글자

임진자 병용 한글자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영조 48(1772)년에로 간행한 [심경]과 [만병회춘]을 자본으로 주조한 15만자의 임진동활자와 함께 사용된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3×1.3㎝이었다. 인본으로는 [명의록], [속명의록] 등이 있다.

정유자 병용 한글자

정유자 병용 한글자는 정조 원(1777)년에 평양감사 서명응(1716∼1787)이 왕명에 따라 15만여 자의 갑인자를 더 주조한 정유동활자와 함께 쓰인 한글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3×1.3㎝이었다. 인본으로는 [논중외대소신서윤음언문] 등이 있다.

초주정리자 병용 한글자

초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는 <생생자>의 단정하고 인상적인 글자를 바탕글자로 하여 정조 19(을묘·1795)년에 주조하기 시작하여 정조 20(병진·1796)년에 주성된 초주 정리동활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0×0.9㎝이었다. 인본으로는 [오륜행실도] 등이 있다.

장혼자 병용 한글자

장혼자 병용 한글자는 정조 때 감인소의 사준(司準)을 지낸 이이엄(而已嚴) 장혼(張混·1759∼1828)이 순조 10(1810)년에 서적을 간행하기 위하여 한자와 함께 사사로이 만든 소형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0.6×0.4㎝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이 활자로 순조 10(1810)년에 [몽유편(蒙喩編)], [근취편(近取編)], [당률집영(唐律集英)] 등을 간행하였으며 한결같이 <경오활인(庚午活印)>이라는 인기가 표시되어 있다. 장혼은 정조 14(1790)년에 옛 홍문관 터에 설치된 감인소의 사준으로 입직하여 오랫동안 인쇄물의 교정을 담당했는데 그의 교정실력은 대단하게 평가되었다.

장혼한글자는 민간이 만든 소형활자이면서도 만든 솜씨가 정교하고 자체가 해정하게 결구된 필서체로서 글자 모양이 참으로 예쁘고 인상적이다.

학부 인서체자 병용 한글자

학부 인서체자 병용 한글자는 고종 32(1895)년부터 다년간 교과서를 간행하는데 학부 인서체자와 함께 사용된 한글 목활자로 <학부 한글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1.0×0.9㎝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학부 인서체자 인본에서 자획이 가늘게 닳고 일그러진 것은 교서관 인서체 철활자이며 자획이 굵고 먹색이 진한 것은 새로 만든 학부 인서체자 목활자이다.

한글활자는 모두 새로 만든 목활자이다. 이들 목활자는 응급조처로 서둘러 새겼기 때문에 자획이 가지런하지 않고 활자모양이 정연치 않아 인쇄상태도 조잡한 편이다.

야소삼자경자 병용 한글자

야소삼자경자 병용 한글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선교를 위해 어린이용 훈몽삼자경(訓蒙三字經)의 체제에 따라, 한자로 번역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 대목을 한자대자 3자씩 구분하여 1자마다 한글로 훈과 음을 표시하고 그 끝에 한글로 토를 달아 인출하는데 사용되었다. 야소교서국(耶蘇敎書局)이 1895년 중국 종이로 간행해낸 [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은 한자대자와 한글소자가 모두 목활자이다.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운영사업과
  • 담당자 우민석
  • 전화번호 043-201-4263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 허락 표시
공공누리 마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출처표시, 상업적 이용금지, 변경금지) 마크

출처 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