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나누고 친절로 베푸는 행복한 탑대성동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조성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말~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탑이다. 이 탑 때문에 탑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한다.
본래 2중기단을 갖춘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상대갑석 이하의 기단부가 결실되고, 2~5층까지의 탑신부와 4층 옥개석 및 상륜부도 복원시에 모작(模作)하여 보강한 것이다. 상대갑석은 2개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밑면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사분원의 몰딩 1단과 그 위에 각형 1단의 받침으로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개석(蓋石)이 각각 한돌로 이루어졌다. 초층옥신의 4면에는 양쪽에 우주(偶柱)가 각출되었으며 그 중앙에 여래좌상 1구씩을 양각하였다. 이 좌상들은 모두 앙련(仰蓮)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두광(頭光)을 구비하였다.
각 면마다 각기 다른 불상을 봉안하여, 현재의 위치대로 본다면 동쪽은 약사여래, 남쪽은 비로자나불, 서쪽은 석가여래, 북쪽은 아미타여래이다. 아미타여래가 서쪽을 관장하는 부처라는 점을 생각하면 위치도 분명치 않다.
각층의 옥개석은 5단의 층급받침을 이루고 윗면에는 2단의 괴임으로 그 위의 옥신을 받치도록 되어 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약간 급한 편이며, 처마 밑으로 낙수홈이 음각되었다. 이 탑은 결실된 부분을 제외하고도 현재 높이가 3m를 넘고 있어 당초에는 6m 이상되는 장중한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방불을 배치한 양식이나 불상의 조각수법, 옥개석의 5단 층급받침과 기단갑석의 양식 등으로 미루어 9~10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실측치는 전체높이 326㎝, 상대갑석 일변길이 192㎝, 높이 20㎝이고, 사방여래좌상은 높이 81.5㎝,양련폭 59.5㎝이다.
참고 - 이 탑이 있는 곳에는 현풍 곽공 원호의 조부, 부, 본인, 아들의 4대 효자정문이 있으며 곽공원호지문내에 있는 현판 내용에 탑동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어 동명의 유래를 나타내 주고 있다.
청주향교 [淸州鄕校]는 조선 초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종 26년(1446)에 세종이 초정(椒井)에 행차했을 때 청주 향교에 서적을 하사한 일이 있고, 또 세조 10년(1464)에 세조가 청주에 행차했을 때 문묘(文廟)에 친히 제향한 일이 있는 삼남 제일의 향교였다.
그 후 숙종 9년(1683)에 현령(縣令) 이언기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하였고, 그 뒤 여러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교생 90명과 자모생 70명이 있었으며, 재직 40명, 노비 13명이 있었는데 고종 31년(1894)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문묘의 제사만 하게 되었고, 1910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령에 의하여 문묘직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건물 배치는 전형적인 전당후묘(前堂後廟)로 내삼문을 두어 구획하였는데 문묘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6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단층목조이고, 그 좌·우에 동무와 서무를, 앞에 내삼문을 두고 그 앞에 정면 5간, 측면 3간의 홑처마 맞배지붕 단층목조의 강당인 명륜당과 외삼문이 서향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중 서무는 1981년 신축된 것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하고 그 양편에 사성(인자, 중자, 자사, 맹자)을 배향하고, 동벽에는 최치원, 정호, 정이, 안유, 김광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서벽에는 설총 주돈이, 주희, 정몽주, 정여창, 이언유,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를 종향하고 있어 매년 춘추로 석전제를 지내고 있으며 또한 한문, 전통예절등의 시민교양교육도장과 전통혼례식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청주에 서양식건물의 도입은 1904년 청주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민노아(F.S. Miller) 목사가 선교를 위해 청주에 온 후 부터이다.
이 건물은 선교사들이 주거용으로 이용하던 건물로 1904년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06년 2동의 건물을 완공하고, 1910-1911년에 3동의 건물, 1932년에 1동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탑동양관(塔洞洋館)은 건립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나타내며, 서양식 건물 건립 초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양관부지내에서 기와와 벽돌을 굽기 위한 질좋은 점토가 발견되었고, 이를 위해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 일을 하였다고 한다.
석재는 주로 지하실 외벽 축조에 사용되었고, 이 건물들 중 한 건물의 기초석은 카톨릭 순교자들이 투옥되었던 청주감옥의 벽에서 가져다 사용하였고 벽돌 및 화강석의 접착제로는 석회에 모래를 섞어 물로 갠 석회모르타르를 사용하였다.
양관의 건립 당시 많은 수입자재가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조하지 못하였던 유리를 비롯하여 스팀보일러, 벽난로, 수세식 변기, 각종 창호 철물류 등이 있다.
탑동양관은 한·양 절충식의 건물로서 외벽은 조적식이고 내부 구조와 지붕은 한식 합작지붕의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