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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로 함께 가꾸는 성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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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동 이야기

성안동 유래

성안동 관내도 이미지

행정구역 개편전인 1998년 2월 1일 이 전에는 문화,서운(서운,남1 2가,북1가),석교,남주,서문동사무소 등 5개의 동사무소가 있었고 상주인구도 12,000여 명이 거주하였으며 충북도청,충북지방경찰청 등 행정기관이 입지하고 성안길과 육거리재래시장,서문시장, 남주동시장과 각종 금융기관은 물론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고 성안동 관내에는 용두사지 철당간,청주동헌, 망선루 등 각종 문화재와 유물 등이 다수가 있어 청주시의 행정,경제,교통의 중심지였으나 외곽지역에 택지개발사업 등 현대화의 물결에 따라 고속버스터미널과 충북지방경찰청이 외곽지역으로 이주하고 대형마트도 여러개 입지하므로 인하여 청주의 중심지로 자부하던 성안동은 도심공동화가 가속화되어 상권이 침체되고 상주인구가 줄어들어 1998년 2월 1일 정부정책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화,서운,남문로1 2가, 북문로 1가,석교,남주동,서문동 등 8개 동을 통합하여 성안동을 만들었다.

성안동에는 약 100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청주시내 한가운데인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하는 청주읍성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헐리고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옛날에 청주읍성이 자리하고 있던 지역 명칭을 들어 성안동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성안길

성안길 관련 이미지

성안길 현황

  • 위 치 : 남문로 1 2가, 북문로 1가, 서문동 일원
  • 시 장 개 설: 1970년대부터
  • 점 포 수: 2,000여 개
  • 번영회원수 : 400여 명
  • 1일 이용객 : 6만여 명

지금은 성곽이 있던 자리가 도로가 되어 남아 있지만 약 100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청주시내 한가운데에는 "청주읍성" 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읍성의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큰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지금의 성안길이 되었다. 청주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은 성안길은 전국에서 번화하기로 손꼽히는 곳의 하나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은 서울의 명동에 뒤지지 않을 정도이며 브랜드를 가진 유명업체들이 입점을 선호하는 곳이기도 하며 특히 성안길은 차없는 거리로 지정하여 오전에만 점포에 물건을 실어나르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고 오후에는 차량은 일절 통행하지 못하고 보행자만 다닐 수 있는 도로이며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일찍이 차없는 거리를 만들었다.
성안길에는 성안길과 연결된 로데오거리와 용두사지 철당간 광장이 있으며 인근에 백화점과 대형 쇼핑센터는 물론 영화관이 3개소나 있고 인근에는 중앙공원,상당공원이 있어 항상 젊은이들로 북적여 젊음의 거리,패션의 거리, 문화의 거리로 손꼽히고 있다.

육거리 재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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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거리 재래시장 현황

  • 위 치 : 석교동 일원
  • 면적 : 45,433㎡
  • 점 포 수: 2,000여 개
  • 상 인 수 : 3,500여 명
  • 주 차 장 : 2개소/3,646㎡/130면
  • 1일이용 : 약 3∼4만명

1950년대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육거리재래시장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남주동의 우시장과 연계한 5일장이 서게 되면서부터 시장규모를 갖추게 되어 청주시민은 물론 청원군민과 조치원,신탄진 등의 주민 다수가 이용하는 중부권 최대 시장이다.

그러나 근대화의 영향으로 외곽지역에 여러개의 대형매장이 입점함에 따라 재래시장이 쇠퇴의 귀로에 서게 되었으며 상인연합회의 자구 노력과 행정기관의 행 재정적 지원으로 아케이트와 주차장 시설 등으로 이제는 성공적인 재래시장 활성화를 이룬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2007.6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갈 정도로 유명해졌다.

청주읍성

청주읍성 관련 이미지

청주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청주읍성을 처음 쌓은 것은 신라 신문왕 9년(689년)때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지방의 통치를 위해 5소경을 둘때 청주에는 서원소경을 두었고(685년) 뒤이어 성을 쌓은 것이다. 이때부터 청주가 중부지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으니 지금부터 천삼백여 년 전의 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청주에 행차하여 성밖에 나성(羅城)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고려말인 공양왕 2년(1390년)에 청주에 큰 물난리가 나서 성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성종 18년(1487년)에 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다.
아쉽게도 현재는 청주읍성의 성곽은 남아 있지 않다. 1911년 일제가 시구개정사업(市區改正事業)을 추진하면서 모두 헐어버렸다.

헐어낸 성벽의 돌은 하수구 축대로 쌓였고 관청의 건물은 점차 헐리어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청주읍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성벽은 사라졌지만 성벽이 있던 자리는 지금도 도로로 되어 남아 있다. 또한 현재의 청원군청 본관 뒤편에는 목조건물 한 채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청주목사가 있던 청주동헌이다. 지방의 수령이 근무하던 곳을 동헌(東軒)이라고 한 것은 그 건물이 관아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니 건물의 서쪽 주차장에는 수령이 거주하던 내와와 객관,누각,창고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헌에는 지방의 수령이 추구해야 할 유교적 이념을 담은 집이름(당호)을 새긴 현판을 걸었는데 청주동헌에는 淸寧閣(청녕각)이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청주읍성에는 남쪽으로 성안길과 남문길이 만나는 지금의 국민은행앞에 남문이 있었고 영프라자 앞에는 동문, 지하상가와 성안길이 만나는 지점에 북문,중앙공원 서쪽편에는 서문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십여 년 전에 옛날 성문터에 표지석을 세워 위치를 알리고 있으며 청주읍성 내에는 청주관아와 용두사가 있었으며 현재에도 청녕각,망선루,서원향약비, 충청병마절도사영문,압각수,용두사지 철당간, 조헌전장기적비,척화비 등 유물이 남아 있고 중앙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공원

중앙공원전경 이미지

청주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중앙공원은 옛날 청주읍성내 청주수령이 근무하던 청주동헌이 자리하던 곳으로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며 상당구 남문로 2가 92번지와 서문동 119번지 등 2필지에 걸쳐있는 중앙공원의 면적은 22,301㎡이며 1976년 3월 27일에 도시계획에 의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중앙공원내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서린 1천 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인 압각수(기념물 제5호)와 유형문화재 제5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무형문화재 제110호인 망선루,임진왜란때 왜군에게 빼앗긴 청주성을 되찾기 위하여 싸웠던 조헌장군과 영규대사,의병장 박춘무를 추모하는 기적비와 한봉수의 송공비,서원향약비 등이 있다.

남석교

중앙공원전경 이미지

청주읍성 남문 밖에 있었던 남석교라는 커다란 돌다리가 지금도 땅속에 묻혀 있다. 건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기원전 57년에 처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매우 오래된 돌다리이다.
남석교는 석교동과 모충동을 연결하는 무심천을 가로질러 놓여진 돌다리로서 너비가 4.1m,길이가 81m에 이르는 아주 큰 다리이다.
옛날에는 무심천을 건너는 제대로 된 다리는 남석교 뿐이어서 남석교를 중심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길이 어어져 있었다. 남석교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주막이 생기고 시장이 생겨 사람들이 항상 북적였다.
남석교가 땅에 묻힌 것은 무심천의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06년 여름 전례없는 대홍수가 났는데 그때 지금의 물길이 만들어졌다.

그후 남석교는 다리 역할을 못하게 되었고 점차 흙에 묻히다가 1932년에 이르러 완전히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남석교는 성안길중 지금의 육거리시장내 도로를 따라 남북으로 놓여 있으며 2005년에 발굴조사에서 거의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석교는 예부터 망선루,용두사지철당간과 함께 청주의 3대 고적(古蹟)으로 꼽혀 왔다.망선루와 철당간이 보존되었듯이 언젠가는 남석교도 땅위로 나와 제모습을 되찾기를 기원하며 지금도 음력 정월대보름이면 지역 주민들과 청주문화원에서는 옛 풍습을 기리기 위하여 남석교 다리밟기 행사를 벌이고 있다. 다리밟기는 다리를 밟으며 다리위에서 액을 보내고 복을 맞이하는 뜻이 있는데 자기 나이만큼 다리 위를 오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화재

충청북도청 본관

< 등록문화재 제 55호,2003.6.30 지정,상당구 상당로 158(문화동) >
충북도청사는 조선시대 말기인 1908년 6월 5일 충주에 있던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옛 병영 건물인 운주헌(현 중앙공원 터)을 이용하다가 1928년말 운주헌 바로 앞쪽에 목조단층 건물을 신축하여 본관으로 사용하였고 1937년 현재의 위치에 큰 연못을 메워 신축하였다.
그후 1937년 6월 조적조 2층 건물로 신축되었고 1959년 3층 함석지붕으로 증축하였으며 1984년 창호 교체, 1990년 지붕 및 천장 교체 공사를 하였다.
현재 건물 안팎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으로 외벽은 붉은 벽돌로 쌓고 타일로 마감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시 관청건물의 기본 평면인 중앙 현관포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장방형 건물로, 증축과정에서도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건립과정과 건물형태,현대적인 건축 이미지 등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충청북도청 본관전경 이미지

충청도병마절도사 영문

< 유형문화재 제15호,1976.12.21지정,상당구 남사로 42(남문로 2가,중앙공원) >
청주읍성 안에 있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의 출입문이다.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었다가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병마절도사는 충청도관찰사가 겸직하고, 따로 전임의종2품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곳에 전임의 절도사가 있고 충청도의 육군을 총괄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조선시대 후기 병영이나 수영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네모진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우물마루로 하고 계자난간을 돌리었다.
기둥 위에는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만든 정면3칸,측면2칸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1988년까지 청녕각(淸寧閣)으로 오인되어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전경 이미지

청주동헌(淸州東軒)청녕각(淸寧閣)

< 유형문화재 제109호,1982. 12.17 지정,상당구 율곡로 27(북문로 1가) >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고을의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관아의 중심건물을 말하는데 현재 청원군청내에 있는 동헌은 「여지도서」에 '근민헌 목사정당 십간' 이라 하여 이 건물의 명칭이 근민헌(近民軒)이고 규모는 10칸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호서읍지」에는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후에 청주목사 이덕수가 근민헌을 개건하고 비를 세웠는데 그 비석에 이덕수가 지은 「중건상량문」을 보면 10칸 규모이던 근민헌을 오늘날과 같은 28칸 규모로 크게 확장하여 개건하면서 편액도 청녕각(淸寧閣)으로 바꾼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이 건물의 처마끝에 장식된 암기와를 보면 조선 순조 25년(1825)에 관아를 전면적 으로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7칸,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현재는 벽과 내부를 개조하고 페인트칠을 하여 군 청사로 사용하고 있어 구조가 많이 변하였다.
건물 정면의 처마밑에는 청주 중앙공원의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에 걸려 있던 '청녕각' 편액이 1988년 11월에 현 위치로 이전 부착되었다.2008년 전체적으로 해체하여 새롭게 복원하였다.

청주동헌 청녕각전경 이미지

망선루(望仙樓)

< 유형문화재 제110호, 1982. 12.17지정,상당구 남사로 42(남문로 2가,중앙공원) >
망선루(望仙樓)는 본래 취경루(娶景樓)라 하였으며 고려시대 관아의 부속 누정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건축 연대와 사용 용도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9년 (1361)홍건적의 침입때 왕이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그해 11월 청주에서 수개월 피신하고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기뻐하여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하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고 그후 몇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망선루 전경 이미지

1922년 일제의 무덕전 신축으로 망선루가 헐리게 되자 청주청년회회장이던 김태희를 중심으로 망선루 보존운동을 전개하여 1923년 제일교회(당시 청주읍교회)에 이건하였다.
이전된 망선루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와 청산여학교,상당유치원 등 민족교육운동과 한글강습,각종 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세광중 고등학교가 이곳에서 탄생하는 등 육영의 장소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근자에 망선루의 노후로 붕괴위험이 있어 원래의 자리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2000년 12월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記蹟碑)

조헌전장기적비 전경 이미지

< 유형문화재 제136호, 1983. 3.30 지정,상당구 남사로 42(남문로2가 중앙공원) >

이 비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한 조헌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조헌(趙憲, 1544-1592)선생의 본관은 백천(白川),자는 여식(汝式),호는 중봉(重峯),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선생은 명종22년(1567)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관직을 거치면서 국정을 바로잡는데 헌신하였고 학문연구에 힘써 학자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1592년 음력 8월 2일 임진란 최초의 승전인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그후 영규대사와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원 전사하였다.
고명경,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4충신의 하나로 거명되는데 매년 청주성 탈환일에 조헌,영규대사,박춘무 장군과 의병들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중앙공원 기적비(記蹟碑)앞에서 거행되고 있다.
이 비는 숙종36년(1710)현재의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때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비의 규모는 높이 230㎝,폭84㎝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압각수(鴨脚樹)

압각수 전경 이미지

< 기념물 제5호, 1976. 12.21 지정,상당구 남사로 42(남문로2가 중앙공원) >

중앙공원 내에 있는 은행나무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2년(1390)에 이초와 윤이가 명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여 이를 반대한 이색등을 살해하고 이현보 등은 유배하였다고 무고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이색 등 10여명이 옥에 갇히는 소위 '이초의 난'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는데 마침 큰 홍수를 만나 이색 등은 이 압각수에 올라 화를 면하였다.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이는 이색 등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석방하였다고 하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나무이다.
압각수라는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류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주장과 나무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약 900년,높이 30m,둘레 8m이다.

척화비(斥和碑)

< 기념물 제23호, 1978.10.27 지정,상당구 남사로 42(남문로2가 중앙공원) >

척화비는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신미양요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이다.
척화비의 내용은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인데 비의 윗부분이 깨어져 '양' 자와 '즉' 자가 없어졌다.
1976년2월29일 석교동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현위치로 옮겼으며 높이 108㎝,폭47㎝의 크기이다.

척화비 전경 이미지

용두사지 철당간(龍頭寺址 鐵幢竿)

용두사지 철당간 관련 이미지

제원

  • 당 간 : 높이 13.1m,철통 20개(당초 30개)
  • 지 주 : 화강암,높이 4.2m,폭 40㎝
  • 철 통 : 지름 43㎝,높이 65.5㎝
  • 철당기: 해서체(글자크기 2.8㎝)

< 국보 제41호, 1962. 12.20 지정,상당구 남문로 2가 48-19) >

용두사지 철당간은 2개의 화강암 지주와 2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당간의 밑에서 3번째 단에 당기(幢記)가 양각되어 있어 그 조성연도(고려 광종 13년,962)를 명확히 알 수 있으며,당시 '준풍(峻豊)' 이라는 고려 독자의 연호를 널리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러나 본 당간이 소재했던 용두사(龍頭寺)의 규모 및 창건과 폐사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당간이란 절앞에 세워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고 정의구현을 목적으로 당이라 불리는 깃발을 달아 두기위한 것인데 만든 재료에 따라 철당간,석당간,목당간으로 불리우며 간두의 모양에 따라 용머리 모양을 취한것을 용두당,여의주를 장식하면 여의당 또는 마니당 사람의 모양이면 인두당이라 하였다. 현재 전국에는 청주의 용두사지 철당간,공주 갑사의 철당간,나주 동문밖 석당간,담양 읍내리 석당간 등이 남아 있으나 용두사지 철당간만이 조성연대가 명확하다.

서원향약비

서원향약비 이미지

옛날 조선시대에 청주목사로 부임한 사람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이율곡이다.율곡은 선조4년(1571년)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그해 가을에 유명한 '서원향약'을 만들어 실시하였다.
서원향약은 양반과 천민을 구별하지 않고 청주지방의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실시하였으며 계형식을 빌려 도계장, 계장,동훈회,색장 등의 임원을 두었고 권선징악의 세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다.
안타깝게도 율곡은 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이듬해 청주목사를 사임하고 해주로 낙향하여 서원향약은 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이때 실시한 서원향약은 조선후기 전국 각지에서 시행된 향약의 모태가 되었다.
중앙공원에는 서원향약비가 세워져 있어서 향약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동창이 밝았으냐'로 시작하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남구만도 현종 12년(1671년)에 청주목사를 지냈다.
그해 가뭄이 극심하였는데 남구만은 직접 도랑까지 파가며 구휼에 앞장서 백성들로부터 "낳아준 것은 부모요,살려준 것은 목사다"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해 상당산성 기우단에서 기우제를 지내 축문이 남아 있다.남구만은 뒤에 소론의 영수가 되어 영의정까지 올랐다.

축제 및 행사

사직제 재현

성안동에서는 2004년 10월 '제1회 청주읍성 성안축제'를 시작으로 매년 10월에 '청주읍성 성안축제'를 개최해왔다.
축제 내용은 풍물단이 옛날의 청주읍성터를 한바퀴 도는 지신밟기를 시작으로 사직제,개회식,동민 노래자랑 순으로 개최해 왔으며 축제비용도 일부는 청주시에서 지원을 해주었으나 각 동에서 무분별한 축제를 개최하므로써 불필요한 예산을 낭비한다는 여론에 의해서 2007년부터는 청주시에서 예산을 전혀 지원해 주지 않았다.
읍성축제를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나 청주시에서 예산을 지원하지 않자 2007년도에는 읍성축제를 생략하고 그해 10월에 개최한 '성안길 축제'시에 무대를 빌려 사직제만 올렸다.
'청주읍성 성안축제'는 동(洞)축제이지만 내용을 보면 청주시의 발상지인 '청주읍성'과 청주시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리는 축제로서 청주시 차원에서 축제를 개최하여야 마땅한 실정이나 청주시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므로 성안동 주민들은 조상님들의 얼을 되새기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판단,2008년도에는 지역주민들의 성금을 기탁받아 '제5회 청주읍성 성안축제'를 개최하였으며 2009년부터는 청주시로부터 축제기금을 지원받고 다른 동(洞)에서 개최하는 일반 축제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축제 명칭도 '사직제 재현' 으로 변경하기로 하고 청주시로부터 일부 예산도 지원받게 되었다.

사직제의 유래

청주의 역사를 살펴보니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자리하고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지배아래 상당현,랑비성, 낭자곡,주안이라고도 했다.
약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지역의 문화와 그 시대의 민속을 뒤돌아보며 조상들이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았는지를 후예인 우리는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조상들은 신비스럽고 무한한 미지의 자연을 두려워하며 모든 자연물에는 어떤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자연을 형성하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저 높은 하늘에 있는 천신(天神)이라고 생각하며 이 절대적인 천신에게 재앙을 물리치고 안녕을 비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의 천신제를 드렸으며 이때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이름 하였다.
그뒤 농경이 시작되면서 농경과 밀접한 지신(地神)에 대한 신앙이 형성되어 곡식을 생산하는 대지를 아기를 낳는 여성으로 생각하는 지모사상에서 대지를 지모신(地母神)으로 이해하고 생생력이 있는 남근(男根)을 바치며 풍요를 빌었는데 이때 지신제(地神祭)를 올렸다.
우리 청주목에서는 토지의 신(神)인 사신(社神)과 곡식의 신인 직신(稷神)을 복합한 신(神)으로 사직신을 제사하기 위하여 사직단을 세우고 원시 농경사회에서 지모신(地母神)에게 풍요를 기원하며 성력(姓力)있는 남근을 바치던 풍습에 따라 길이 2자 5치 너비 1자의 남근(男根)을 바쳤던 것이다.
그때 백성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청주목사(淸州牧使)가 제주가 되어 유교식으로 사직제를 지냈는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日帝)가 사직제를 폐지하여 흔적조차 알 수 없었는데 청주읍성 성안축제를 개최하면서 사직제를 올리는데 참으로 뜻이 있다 하겠다.

사직제 사진 이미지

성안길 페스티벌

성안길 페스티벌 이미지

성안길에는 상인들로 이루어진 성안길 번영회가 있다.주로 북문로 1가,남문로 2가 서문동 일부지역에 있는 상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안길 번영회에서는 1995년부터 매년 5월에 성안길 축제를 개최하다가 2006년부터 10월에 개최한다.

축제는 크게 전체적인 공동행사와 각 주최자들이 주관하는 특별행사로 꾸며진다.주요행사는 철당간 광장과 구 조흥은행 앞 남문길 청소년광장에서 펼쳐지고,별도 무대와 간이 무대를 설치해 공연과 문화장터 등을 개최한다. 축제 개막식을 공식행사의 시작으로 청소년 축하공연과 난타 퍼포먼스,대중가수 축하 공연, 대학생 동아리 공연 등을 진행한다.

남석교 답교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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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청년회의소(청주JC)와 청주경실련,청주육거리시장 번영회연합회 등 3개 민간단체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매년 정월대보름날 개최하고 있다.남석교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청주 무심천 제방개량공사 이전까지 남부지역에서 청주 시내로 들어오는 대표적인 교량이었다.그러나 무심천의 흐름이 현재의 물길로 바뀐 뒤 남석교는 그대로 땅 속에 묻히게 됐다.현재는 육거리시장 새마을금고 인근 4거리 하수구 맨홀을 통해 교각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답교놀이는 육거리 재래시장 입구에서 거행되며 남석교가 그러진 무대를 설치하고 무대아래에 푸짐한 제상을 마련하고 청주시민의 안녕과 육거리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 후 넘석교가 그려진 무대를 오가며 다리를 밟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며 답교놀이를 통해 충북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육거리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고 앞으로 청주의 문화유산인 남석교를 발굴,복원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