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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안내

Cheongju city

우리동소개

모충사(慕忠祠)

  • 모충사 전경 [모충사 전경]
  • 기념비 [기념비]
  • 연의당 [연의당]
  • 홍재의 영세불망비 [홍재의 영세불망비]

모충교에서 개신동 충북대병원으로 가는 고개길 중간 오른쪽에 있는 사당이다. 이 곳에는 동학농민전쟁때 농민군에게 죽은 장졸 70여명의 위패가 있으며, 기념비가 입구에 서 있다. 고종 31년(1894) 10월 충청병영의 영관 염도희는 7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전방면의 동학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출진하였다. 그러나 청원군 강외면 지역에서 동학군의 매복에 걸려 몰살하고 만다. 이는 동학농민전쟁 막바지에 관군이 입은 최고의 피해였다. 그해 11월 남석교 밖에 모충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광무 7년(1903) 모충단이라는 호를 받아 당산에 단을 쌓고 기념비각을 건립하였다.한일합방후인 1914년 당산에 모충사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 3에 제향하다가 일제의 신사 건립으로 1923년 고당(지금의 서원대)으로 옮겼다가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충효양전문(忠孝兩全門)

충효양전문

조선 숙종때 문신인 연최적(延最績, 1663∼1693) 의 정려문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택로(宅老)의 아들로 청주 출신이다. 송시열의 문인(門人)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다.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옥사하였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1695년 순무사(巡撫使)가 그의 효친을 계달(啓達)하여 정려(旌閭)되었으며, 1747년(영조 23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大提學)이 더해지고 이듬해 충효양전문이 청주시 모충동에 세워져 현존한다.
시호는 의민(毅愍),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저서로는 치당유고(痴堂遺稿)가 있다.

청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청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청주시 모충동 산 36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비로자나불좌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불상인데,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공원에서 전하던 것을 해방직후 모충동에 청화사가 세워지면서 옮겨왔다고 한다.
상높이 120㎝의 작은 상으로, 광배와 대좌가 한 돌에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 높은 삼면보관을 썼고 그 위로 보발이 보인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양감이 있어 고운 인상이나 상호는 마멸되어 알 수 없다. 어깨는 넓지 않고 목에 삼도가 있으며 몸에는 부드러운 양감이 드러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이 벌어지지 않게 입었고 옷주름은 깊은 음각선으로 밀집되게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왼손이 오른손의 둘째 손가락을 쥐고 있는 지권인이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앞부분은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다.
광배에는 두광과 신광이 있어, 두광에는 연판문이 얕게 부조되었고 그 바깥으로는 화염문이 있다. 대좌는 원형으로 윤곽선이 굵은 연판문이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보관을 쓰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예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편인데, 대구 동화사의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 사리함에 선각된 비로자나불좌상은 가장 비교되는 예이다. 제작시기는 양식적으로 고려불상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어서 고려초 정도로 추정된다.
불상이 있던 청화사는 근래 소실되어 절터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