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최적(延最積, 1663~1693)
조선 숙종때 문신으로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택로(宅老)의 아들로 청주 출신이다. 송시열의 문인(門人)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다.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옥사하였다.
이듬해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1695년 순무사(巡撫使)가 그의 효친을 알려 정려(旌閭)되었으며, 1747년(영조 23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大提學)이 더해지고 이듬해 충효양전문이 청주시 모충동에 세워져 현존한다. 시호는 의민(毅愍), 저서로는 치당유고(痴堂遺稿)가 있다.
강기용(康基用, 1917~1978)
운호학원(雲湖學園)을 설립, 지방 굴지의 사학으로 성장시킨 육영 독지가이다.
1917년 평안남도 용강군(龍剛郡)에서 태어났다. 1932년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하여 진남포 공립상공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진남포 법경전문대학 재학중에 고당(古堂) 조만식(曹晩植)이 영도하는 조선민주당 진남포 시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에 대항하였으나 1948년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월남 후 1948년부터 50년까지 청주농립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하여 53년 봄에 졸업한 후 경희대 청주 분교 강사와 학산중학(鶴山中學) 교장을 역임하면서 창학의 꿈을 키웠다.
6·25의 비극을 겪은 그는,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교육입국이 절실함을 깨닫고 창학의 뜻을 세워 1954년 운호학원을 창설하고 맨 먼저 남문로에 신라여중(현재의 충북여중)을 개교하였다.
6년 후인 1960년에는 모충동 용두산으로 이전하고 이어서 청주여상, `66년에는 운호초등학교, `68년에는 운호중학교와 운호고등학교, 그리고 청주여자사범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에 취입하였으며 `75년에는 부속 여고가 설립되었고 그후 여사대는 남녀공학의 청주사범대학으로 변경되었다가 `92년 4월 현 서원대학으로 개칭 명실공히 종합대학으로 자리잡았다.
이같은 육영사업으로 교육발전에 공헌한 공적으로 1969년 충청북도 문화상이 수상되었고, `72년 국민훈장 목련장, `73년에는 전국 사학재단 연합회장으로부터 교육특별공로상이 수여되었다. 한편 이 해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운호학원의 발전을 위해 정력을 기울여 온 선생은 1978년 62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학교장(學校葬)으로 엄수되어 캠퍼스가 내려다 보이는 구룡봉 아래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