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나누고 친절로 베푸는 행복한 남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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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희 가옥은 조선 철종(哲宗) 12년(1831)에 지은 한옥이다. 건물의 구조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옆퇴가 있는 1칸의 건너방과 골방을, 오른쪽에 퇴가 달린 안방과 윗방 부엌이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ㄱ자로 된 안채와 그 앞에 대문이 달린 일(一)자로 된 9칸의 곡간채에 이어 1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퇴가 있는 건너방, 그리고 사랑방과 앞마루가 있는 정면 4칸, 측면2칸으로 된 사랑채로 되어 있는데 현재의 사랑채는 30여 년 전에 지은 것이다. 안채는 홑처마 합각지붕의 기와집이다. 현재 이항희(李恒熙)씨 일가가 살고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태위(太尉) 한란(韓蘭, 853~916) 공을 안장(安葬)한 묘소와 그의 위업을 기리는 신도 비이다. 원래의 묘소는 조선 효종(孝宗) 10년(1659)에 노봉(盧峯)에 의해 파손되었으며, 후손들이 숙종(肅宗) 16년(1690)에 봉분을 복원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지만 고려시대의 묘비(墓碑)와 상석(床石)등이 현존하고, 효종때의 문인석(文人石)과 용마석(龍馬石)이 보존되어 있다. 묘소 아래에는 영조(英祖) 44년(1768)에 세원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후손인 한익모(韓翼募)가 찬(撰)하고 한광회(韓光會)가 비문을 썼으며 한덕필(韓德弼)이 제전(題篆)을 썼다.
체화당사는 조선 숙종(肅宗) 27년(17010에 송헌(松軒) 노계원(盧繼元, 1532~1586), 국헌(菊軒) 노후원(盧後元, 1533~1592), 지평(持平) 매헌(梅軒) 노종원(盧從元, 1535~1583), 죽헌(竹軒) 노일원(盧一元, 1539~1611)등 4형제의 위폐를 봉안하고 설립한 서원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에 따르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이들 4형제의 남다른 우애를 보고 선조(宣祖)에게 아뢰니 선조가 친히 "逮華堂"이란 어필(御筆)을 써서 그 집에 걸도록 하여 당호(堂號)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들의 사당인 체화당사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집과 현판이 불에 타 숙종 27년(1701)에 다시 세우고 영조(英祖) 37년(1761)에 서암(西菴) 노덕원(盧德元, 1549~1629)을 추향하였는데 원생(院生) 17명을 둔 사원(祠院)이었다. 그러나 고종(高宗) 8년(1871)에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는데 1967년 남일면 신송리 큰뫼마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중정일(仲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서원은 1967년 중건하고 1988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사당 안에는 1967년에 권용직(權容稷)이 짓고 이범규(李範圭)가 쓴 "체화당중건기"를 걸었고 박에는 "체화당사"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이우겸(李宇謙)이 짓고 성영(成泳)이 써서 숙종(肅宗) 45년(1719)에 세운 체화당사적비(逮華堂事蹟碑)가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다.
충현사는 조선 정조 8년(1784)에 병자호란때 순절한 사복시주부(司僕侍主簿)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 1588∼1637)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사당이다. 매년 기일인 음력 정월 23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89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충현묘(忠顯廟)"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 충신각은 조선 숙종39년(1713)에 병자호란때 철산부사(鐵山府使)로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순절하여 인조때에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복호(復戶)된 지여해(池汝海, 1591∼1636)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32년에 중건하고 1960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충신문 편액을 걸었다. 현재 외손인 은진송씨(恩津宋氏) 안소당공파(安素堂公派)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효자비는 조선 숙종 12년(1686)에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성종 9년(1748)에 사재주부(司宰主溥)에 상직되고 이산현감(泥山縣監)에 오른 청주인(淸州人) 남계(南溪) 경연(慶延)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비다. 효자비에는 "효자 현감경연의 마을(孝子 縣監慶延之里)"이라 새겨져 있다. 이 비석에 세워진 비각은 195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이 효열비는 1975년에 인동인(仁同人) 장인수(張仁壽)의 처 교하노씨(交河盧氏, 1905~)의 효열을 기리어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노장우(盧章愚)가 짓고 조수형(趙壽衡)이 썼다.
1974년에 세운 비각은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이 효자각은 1890년(고종27) 효행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의 품계를 받은 동래인(東萊人) 정시엽(鄭始燁, 1770∼1863)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시멘트로 정려의 밑 부분은 막았고 둥근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로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두르고 안에 ‘효자행통정대부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동래정시엽지려(孝子行通政大夫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東萊鄭始燁之閭)’라고 쓴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건물 안에는 1935년에 종정원경(宗正院卿) 이명상(李明翔)이 지은 ‘효행정려기(孝行旌閭記)’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