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나누고 친절로 베푸는 행복한 용담명암산성동
상당 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2km, 높이 3∼4m, 면적 5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최초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당 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장군이 쌓았다는 기록,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주목 고적조에 '고상당성'은 율봉역의 북(뒤)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 7,773척인데 성 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상당 산성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에서 45년까지 충청병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성벽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성 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성문 무사석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수축이 이루어져 성 내의 여러 시설인 관아사, 군기고, 창고, 수구, 장대, 포루 등이 완성되었다.
현재 상당 산성에는 동문(鎭東門), 서문(쭴虎門), 남문(控南門)의 3개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는데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정비공사로 동·남문루와 동문이 재건되었고 1992년말에는 동장대(輔和亭)도 재건되었다. 또한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制勝堂)의 규모(15평)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만든 것이다. 성 내에는 전통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민족주인 대추술과 함께 다양한 민속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비는 1982년 청주시 운천동 속칭 산직마을의 공동우물터에서 빨래돌로 쓰여 왔던 것을 주민의 신고에 의해 충북대학교와 충청북도가 조사하여 통일신라시대 청주 지방의 어떤 사찰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사적비(寺蹟碑)로 확인되었다. 앞·뒷면은 15행 17-19자, 한쪽 앞면은 3행 19자의 글자가 북조풍의 전형적인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으며 비의 크기에 견주어 글자가 큰 편이다.
이 비는 마모가 심하여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불법(佛法)을 찬양하고 임금의 덕을 칭송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절의 창건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특히 아간, 보혜, 해심법사 등 관직명과 승려 이름이 보이고 수공(壽拱) 2년의 연호(年號)가 있어 통일신라 신문왕 6년(686)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685년 청주 지방에 신라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西原京)의 설치와 관견지어 볼 때 청주가 행정·군사·문화적 중심지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92㎝, 너비 91㎝, 두께 15-20㎝로서 재질은 화강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