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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신도비(崔鳴吉 神道碑)

최명길 신도비(崔鳴吉 神道碑)

소재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253-3

종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소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인조(仁祖)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영흥부사 기남(起南)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38년(1605)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을 거쳐 예문관 전적(典籍)이 되었고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유폐(幽閉)하고 정치가 날로 어려워지매 김유(金流)·이귀(李貴) 등과 뜻을 합해 인조를 영립(迎立)했으며 그 공으로 참의(參議)에다 1등 공신이 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정묘호란(丁卯胡亂)때는 주화론(主和論)을 계속 주장하여 청(淸)나라에 항복하는 역사의 비운을 겪었으나, 이때 우의정이 되어 위로는 왕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국내외가 점점 안정되도록 하였고, 좌의정 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성리학(性理學)과 문장(文章)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는 동기창체(董基昌體)로 유명했다. 저서로는 지천집(遲川集) 19권, 경서기의(經書記疑), 병자봉사(丙子 封事)등이 있다. 신도비는 묘소 앞에 있는데 숙종(肅宗) 28년(1702)에 세워졌고, 1979년에 비각을 신축하였다.

낭비성(娘臂城)

낭비성(娘臂城)

소재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광암리 산41

종류

충비지정 문화재(성곽)

소개

북이면 부연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 250m의 산정부와 남쪽의 계곡을 감싸고 설축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각종지리지에 낭비성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 청주를 일명 낭비성(娘臂城)이라 기록하였으 며, 그 후의 여러 읍지(邑誌)에 같은 내용이 보이고 있어 이 산성을 <삼국사기>에 보이는 낭비성(娘臂城)과 동일한 산성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성의 둘레는 약 743m로서 축성은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산세가 험한 곳은 그대로 성벽을 쌓아 올리고 비교적 험하지 않은 곳은 성 안쪽의 경사면을 깎아내어 성토(盛土)한 후 폭 5.3m, 깊이 3.6m의 구덩이를 파고 잡석 또는 판석으로 기초를 다진 후에 석축하였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으나 북동쪽에 일부의 성벽이 남아있어 축성방식을 짐작하게 해주는데 석재는 화강조면암(花崗粗面岩)을 주로 사용하고 간혹 화강편마암(花崗片磨岩)을 사용하였다.

축조공법은「막힘줄눈쌓기」와 「臣字形쌓기」의 방식을 이용하였고, 성벽 안쪽에는 평지를 두어 도로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지는 북 ·동 서의 3곳에서 확인되었고, 수구는 동문지와 남문지에 있는데 남쪽의 수구 는 남문 안쪽의 웅덩이 밑바닥에 성외까지 잡석을 깔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아 성안의 물이 이 잡석 사이를 통하여 배수되도록 한 맹수문(盲水門)으로 되었다.

그리고 남문지 안쪽 16m지점에 가로 3.2m, 세로 1.3m, 깊이 1.8m의 직사각형 웅덩이가 있어 우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성내의 각처에서는 백제계의 조질적색토기(粗質赤色土器)와 조질회색토기 및 경질회백색토기가 다수 출토되며 통일신라기의 토기편도 수습된다. 기와조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각종 기와편 그리고 고려초의 토기와 청자편이 발견된다.

죽계사(竹溪祠)

죽계사(竹溪祠)

소재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용계리 173-11

종류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소개

죽계사는 조선 영조 14년 (1738)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1424∼1457), 순흥부사(順興府使)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1124∼1457)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 운 사당이다. 그리고 정조 16년(1792)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7),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을 추향하고, 정조 29년(1799)에 한남군(漢南君) 이어(李어, 1492∼1495), 영풍군(永豊君) 이천(李천)을 다시 추향하였다.

그러나 고종 6년(1869)에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60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3월 9일에 향사한다. 지금의 사당은 1960년에 중건하고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3간, 측면2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양회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고 "죽계사(竹溪祠)"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마당 앞에 "성인문(成仁門)"이라고 이름한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을 쌓았다. 그리고 바깥마당에는 성균관장인 박중훈(朴重勳)이 짓고 이성목( 李性穆)이 쓰고 1960년에 세운 "죽계서원유적비(竹溪書院遺蹟碑)"가 있으며 앞에 "죽계서원"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있다.

김한정 충신각

김한정 충신각)

소재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성리 410-7

소개

이 충신각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백면선생으로 의병을 일으켜 반란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된 충신 경주인(慶州人) 낙당(樂堂)에 김한정(金漢廷, 1688∼1728)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60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문 편액을 걸었다. 이밖에 고종 24년(1887)에 김영목(金永穆)이 지은 "충각서(忠閣序)"와 고종 25년(1888)에 송근수(宋近洙)가 지은 "충려기(忠閭記)" 등의 기문판이 걸려 있다.

윤관 초상 (尹瓘 肖像)

윤관 영정(尹瓘 影幀)

소재지

청주고인쇄박물관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종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소개

윤관(尹瓘)은 고려 중기의 명신으로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파평(波平)이다. 고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숙종(肅宗) 9년(1104)에 동북면행영 병마도통(東北勉行營 兵馬都統)에 임명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으나 예종(睿宗) 2년(1107)에 여진정벌 원수(元帥)가 되어 동북계에 있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진국공신(鎭國功臣)이 되었다.

영정은 1910년경에 후손들에 의하여 제작되어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집의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봉안하였는데 무관상(武官像)과 문관상(文官像)을 각각 1폭씩 그려졌다.

파평 윤씨 문중에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윤관의 본래 영정은 함경북도 북청군 소재의 만뢰사(萬賴祠)에 봉안되어 왔던 것을 1902년에 모사하여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그 후 영당 건물이 퇴락하고 영정의 모습이 무속적(巫俗的)인 인상이 짙다는 여론이 있어 1980년에 영당을 다시 중수하고 영정도 학계의 고증을 받아 새로이 문관상(文官像)을 제작하여 앞의 무관상(武官像)과 함께 나란히 봉안하였다. 제향(祭香)은 장군의 탄신일인 음력 3월 10에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