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나누고 친절로 베푸는 행복한 미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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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 435
도지정 무형문화재 제4호
1994.01.07
근대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하였다. 기능전승보유자는 박남희이다.
청주시 지역에서 유일하게 전통민속주로 지정되어 있는 술이다. 미원의 함양박씨(咸陽朴氏) 집안에서 18대째 약 400여 년 동안 전승되고 있는 가양주(家釀酒)로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박숭상이 이 마을로 낙향한 후 이 술을 빚는 비법이 전해졌다고 한다.
신선주라 부르는 것은 일찍이 신라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이 마을 앞의 신선봉(神仙峰)에 정자를 짓고 이 술을 즐겨마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선주의 제조는 예부터 물이 좋기로 이름난 미원지역의 물을 이용하여 보신강장용 생약제를 찹쌀·누룩 등과 함께 발효시켜 청주 또는 증류주로 만드는 것이다.
복용하면 변비를 없애고, 머리를 검게 하며. 노화를 방지하여 수명을 늘린다고 한다. 독특한 향이 있고 후유증이 없다. 또한 마신 후에 숙취가 되지 않고 머리가 맑아져 마시기에 매우 좋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신리 산13
비지정 문화재(성곽)
미원면과 내수읍 사이의 경계에 있는 해발 497m의 구라산(謳羅山)에 축조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조선시대의 지리지에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구라산성은 청주의 동쪽 41리에 있으며 둘레는 2,790척이고 성내에 2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구라산은 고려산(高麗山)·구려산(句麗山)·궁예산(弓裔山)·구녀산(九女山) 등의 별칭이 있는데 지금은 주로 구녀산으로 불려진다. 산성의 둘레는 약 856m이며 형태는 부등변방형인데 성내에서 가장 높은 북단에서 양쪽으로 이어진 능선이 남쪽 계곡을 향해 점차 낮아져 삼태기 모양을 이루었다. 기반은 2중쌓기로 한 후에 석루(石壘)를 쌓아 올렸는데 석루는 대부분 붕괴도어 유구가 토로(土壘)처럼 남아있다. 이티재(二日)에 올라가는 능선의 서북단 남쪽부분에 석성벽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높이 7m, 폭 8m, 두께 6.3m의 내외협축성(內外夾築城)이었음을 보여준다.
산성의 시설로는 남쪽 수구 옆에 있는 남문지와 북쪽과 서쪽의 작은 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정상부에 망대가 있었던 듯하나 완전히 붕괴되었고, 성벽이 능선으로 이어지는 북·남·서 모퉁이에 곡성(曲城)이 설치되었다. 성내의 남쪽에는 옛절터에 세운 구려사(句麗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1979년 종암리로 옮겼다. 주위에서는 신라계의 토기, 기와조각이 많이 수습되고 간혹 백제계의 토기편도 발견되며 고려초의 토기·기와조각이 발견된다.
구라산성의 지세 및 지형적인 배려와 성문, 망대, 수구의 배치 그리고 출토유물을 통해 보거나 또는 한 아들과 아홉딸에 얽힌 축성신화(築城神話)로 미루어 볼때 신라측에서 축성하여 낭비성(娘臂城)의 백제 또는 고구려와 대결하기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각축장으로 소속이 자주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군사가 주둔하여 낭비성의 견훤(甄萱)과 전투를 치렀고 고려시대까지도 성곽의 기능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 출처 : http://tourpuru.cheongju.go.kr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운암리
비지정 문화재(선사유적)
운암리 청석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미원천(米院川)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동굴유적으로서 옥화9경의 제1경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동굴이 양지바른 언덕 위에 정남향으로 뚫려 있고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
동굴은 입구가 넓고 높아 출입이 편리하며 바닥은 평평하고 굴 끝은 막혀있다.
발굴조사되지 않아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대략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사람들이 동굴주거지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수산리
비지정 문화재(선사유적)
수산리 원미마을을 지나는 미원-초정간 지방도로의 동쪽둔덕에 있었던 고인돌로서 도로건설로 인하여 길옆으로 옭겨져 방치되어 잇다가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로 이전하여 많은 사람이 볼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고인돌은 이미 파괴되어 개석만 남아 있는데 크기는 길이 240cm, 너비 120cm, 높이 70cm이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비지정 문화재(성곽)
미원면 소재지에서 보은 방면으로 1km쯤 가다가 미원천(米院川) 건너편인 성대리 터말마을 뒤에 솟은 해발 346m의 산봉우리와 그 남사면(南斜面)에 걸쳐 석축의 내성과 토성의 외성을 이룬 테뫼식산성으로 문헌기록에는 일체 언급이 없다.
이 산성은 위치상으로 청주에서 보은으로 통하는 길목의 요충지인 동시에 미원에서 북으로 구라산성을 넘는 옛교통로와 북서쪽으로 상당산성, 동쪽으로 청천 괴산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분기점에 위치하였다.
석축의 내성은 북쪽의 가장 높은 산정부 아래로 가파른 경사를 이루었는데, 기단을 보강하여 할석을 쌓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정상에서 동향하면서 차츰 내려간 성벽은 동쪽에서는 거의 무너졌고, 서향한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가운데 일부의 석축이 남아 있어 내외협축성(內外夾築城)임을 알 수있다.
외성은 내성의 남서단(南西端)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꺽이어 계곡을 건너 다시 능선을 따라 올라와 내성의 동남단과 연결되었다.
성의 시설로는 남문지와 서문지가 희미하게 남아있고 우물터 1개소가 있다. 그리고 성내에서 신라의 적색토기편과 백제계의 회백색경질토기가 많이 출토되며 적색토기 중에는 우각형 파수가 발견되었다.
한편 이 산성에서 서남쪽에 보이는 해발 517m의 속칭 "돌봉산"에 둘레 155m의 석축성이 있는데, 위치와 규모로 보아 독립된 산성이라기 보다는 낭성산성에 부속된 보루형(堡壘彩)으로서 장대나 망대 또는 봉화대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낭성산성은 신라의 진흥왕(眞輿王) 12년(551)에 왕이 변방을 순수하다가 우륵(于勒)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낭성(娘城)과 동음(同音)이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낭성(娘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신리
비지정 문화재(사지)
구라산성(謳羅山城)의 남쪽 계곡에 절터로서 이곳에 있던 구려사(句麗寺)가 1979년에 미원면 종암리로 이전하여 옛터는 폐허가 되었다. 구려사라는 사명은 근래에 옛 절터에 사찰을 다시 세우고 붙인 명칭으로 본래의 절이름은 알 수 없어 편의상 구라산성사지(謳羅山城寺址)라 한다.
구라산성 안의 남쪽 경사면에 2단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만들고 법당과 요사를 세운 듯 한데 현재 수목이 우거져 원형을 찾을 수 없다. 절터에는 두부(頭部)를 결실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과 측면에 당초문을 양각한 화강석재의 석제 소맷돌이 있었는데, 석불은 종암리로 이전된 구려사로 옮겨져 대웅전 앞에 안치되었으나 소맷돌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조성 연대는 나말려초(羅末麗初)로 추정되어 이곳 사지의 창건시기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비지정 문화재(불교유적)
구라산성 안의 구려사(句麗寺)에 있던 불상으로 1979년에 종암리로 사찰이 옮겨질 때 함께 이전되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결과부좌한 불상인데 두부와 대좌. 광배가 모두 결실되고 오랫동안 비바람에 시달려 마멸이 심한 상태이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흔적이 보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은 살이 찌어 있다.
비록 작은 석상이나 어깨는 당당하고 가슴 아래에는 군의(裙衣)가 나타나 있다. 수인(手印)은 양손을 무릎 위에서 가지런히 모은 것으로 보아 선정인(禪定印)을 결한 듯한데 마멸이 심하여 손의 자세는 알 수가 없다. 의문(衣紋)은 얇게 표현되어 몸 전체가 풍만하게 드러난 인상이다.
발아래까지 사실적이고 유려한 옷주름이 흘러내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조각이 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성연대는 나말려초(羅末麗初)로 추정된다. 불상의 크기는 현재높이 52cm, 어깨높이 52cm, 어깨너비 39cm, 무릎높이 14cm, 무릎너비 48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