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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사 대웅전(月裡寺 大雄殿)

월리사 대웅전이미지

지정일

1980년 1월 9일

소재지

청주시 문의면 염티소전로 55-100

규모

정면 3칸, 측면 3칸

시대

조선 효종(孝宗) 8년(1657)

소개

월리사 대웅전은 이 절의 입구에 있는 사적비(事蹟碑)에 의하면 조선 효종(孝宗) 8년(1657)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이웃에 있던 신흥사(新興寺)를 옮겨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에 옮겨지은 것으로 보이며 처마끝의 암막새 기와에 ’옹정경술’ 이라는 양각 글씨가 있어 영조(英祖) 6년(1730)에 한차례 중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건축양식으로 보아서도 조선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다포식(多包式)이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의 주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훨씬 굵고 높다. 앞면의 기둥 사이는 모두 정자문(井字門)을 달았으며 두공은 조밀하게 배치하고 살미 끝은 날카롭게 휘어졌다.
처마는 겹처마로 네곳의 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워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이 반전한 추녀 끝을 받치고 있어서 팔작지붕 건물에서 보이는 한국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아 두공을 받고 있는데 두공의 배치는 어간(御間)에 2구, 협간(夾間)에 1구씩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문산관(文山館)

 문산관이미지

지정일

1978년 2월 22일

소재지

청주시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대청호미술관

규모

정면 10칸, 측면 3칸

시대

조선 현종(顯宗) 7년(1666)

소개

문산관(文山館)은 조선시대 문의면(文義)의 객사(客舍)이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있던 관사(館舍)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구조는 지붕이 좀더 높은 정당(政堂)이 중앙에 있고 그 좌우로 익실(翼室)을 두고, 전면에 중문(中門), 외문(外門), 측면에 무랑(無廊) 등이 부속되며, 정당은 벽돌을 깔고 좌우익실은 온돌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산관은 목조기와집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의 2익공 집인데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그리고 바닥은 정당은 온돌이고 좌우익실은 한국식 우물마루로 되어있다.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단지 옛 문의읍지(文義邑誌)에 현종(顯宗) 7년(1666)에 현령 이명하(李鳴夏)가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붕의 암막새 기와에 ’옹정 6년 무신 4월(擁正六年 戊申四月)’이라 새겨진 글씨로 보아 조선 영조(英祖) 4년(1728)에 한차례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79년에는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산관이 수몰지역에 있게 되어 문의향교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1997년에 문의문화재단지의 현위치로 옮겨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청원 산덕리 태실

청원 산덕리 태실이미지

지정일

1993년 6월 4일

소재지

청주시 문의면 산덕리 산 411번지

규모

1곽 15평

지정일

1981 12월 26일

시대

조선 선조 21년(1588)

소개

태실은 왕가의 태를 묻던 석실로 태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손의 아기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임시로 설치하여 안태사로 하여금 명당자리를 찾아 태를 묻도록 하였다. 이곳은 태실이 있으므로 태봉이라는 산이름을 갖고 있으며, 이 안에 묻힌 태함은 반구형의 개석을 갖춘 원통형으로 석회암으로 된 석함과 개석을 별도로 조성하여 태항아리를 봉안하고 봉분을 조성하였다. 석함은 직경 118㎝, 높이 76㎝로 바깥면을 다듬고 안에는 직경 64㎝, 깊이 58㎝의 내실을 마련하였으며, 개석은 직경 119㎝, 높이 63㎝의 반구형으로 4귀를 돌출시켜 태함의 4귀와 맞추게 되어 있다. 이 태실의 주인공과 건립시기를 명기한 태실비는 석회암제로 비신과 비수는 동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비수 상단의 연봉형 장식은 결실되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나 ‘만력십육년무자’에 세운 아지씨의 태실이라는 명문이 판독되어 조선 선조 21년(1588) 에 태어난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 공의 태실로 추정된다. 태실과 태실비는 1928년경에 도굴된 후 유실되었던 것을 1994년에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봉석주 부조묘

봉석주 부조묘

지정일

1988년 9월 30일

소재지

문의면 마동리 168번지

규모

정면 3칸, 측면 1칸반

시대

1926년

소개

봉석주 부조묘는 조선 숙종 20년에 회인현 서면 동막리 오늘의 청주시 문의면 마동리 동막마을에 단종 1년(1401) 계유정난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강성군에 봉해진 봉석주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일명 강성사 또는 하음사라고 하며 매년 음력 9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26년에 중건하고 1970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온돌방에 중앙에 분합문을 달고 앞과 좌우에 퇴를 두었으며 사당 안에 1926년에 승정원 우승지를 지낸 이상각이 짓고 안방준이 쓴 모충사우기와 12대손인 봉만균이 짓고 쓴 중수기가 있으며, 밖에는 ‘모충사’라는 현판을 달았고 마당 앞에 일각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작은용굴

작은용굴

소재지

청주시 문의면 구룡리

종류

비지정 문화재(선사유적)

소개

구룡리 마을뒤에 있는 석회암 동굴로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으며 두루봉동굴과 함께 금강유역의 구석기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동굴은 석회암지대에 발달된 수평동굴로서 굴의 크기는 입구너비 2.6m 높이 3.5m 길이 60m이며, 입구에서 32m 되는 지점에 12.3m × 7.3m 정도 크기의 광장이 있어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생활공간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한 정확한 유적의 성격이나 상황은 알 수 없다.

가호리 고인돌

가호리 고인돌

소재지

청주시 문의면 가호리

종류

비지정 문화재(선사유적)

소개

지금은 대청댐으로 수몰된 가호리 아득이 마을에 있었던 고인돌이다. 1977년에 발굴조사한 이후에 대청댐 수몰지경의 밖인 마을 입구로 옮겼다가 1997년에 다시 문의문화재단지 야외전시장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고인돌의 개석(蓋石)은 2조각으로 깨져 있는데 본래의 크기는 길이 304cm, 너비275cm, 높이55cm로 큰 편에 속한다.
또 이 큰 개석의 무게를 지탱하는 지석(支石)은 판석형(板石形)으로 개석과 같은 암질이다. 장축방향은 서북서로서 강물의 흐름과 같은 방향을 취하였다.

양성산성

양성산성

소재지

청주시 문의면 미천리

종류

지정 문화재(성곽)

소개

옛 문의현(文義編)의 치지(治地)이고 현재는 문의면 소재지인 미천리 마을 서쪽에 있는 해발 292m의 양성산(壤城山,養性山) 정상부를 둘러싸고 토석축(土石築)한 테뫼식 산성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의하면 양성산은 문의 동쪽 2리에 있는 주산(主山)으로서 봄가을로 현령(縣令)이 제사를 지내고 가뭄때는 이 산에 있는 둥근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산이름은 조선후기로 가면서 한자표기가 양성산(養性山)으로 바뀌었다. 문의는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가 신라때 연산군(燕山郡)이라 하였으므로 양성산성은 곧 일모산성 ·연산성으로 비정된다.
일모산성(一牟山城)은 [삼국사기]에 신라 자비왕(慈悲王) 17년(474)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일모산군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연산군으로 바뀌었고 고려 태조 8년(925)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금弼)을 파견하여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고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으며, 동왕 15년(932)6월에 일모산성을 친히 정벌하여 이를 파하는 등 많은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사실이 있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명칭이 태산석성(竟山石城) ·앙성산성(壤城山城) ·연산성(燕山城) 또는 양성(壤城)으로 나타나 있으며 둘레가 192척(尺)이나 되었고,가뭄이나 큰 비에도 마르거나 넘치지 않는 큰 연못이었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산성은 세 개의 산봉우리와 1곳의 계곡을 감싸고 설축되었는데 둘레는 약 845.5m로 테뫼형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험한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을 쌓았는데 본래 험한 산봉(山峰) 정상부의 약간 아래부분을 삭평(朔平)하여 테를 두른 것처럼 토루(土壘)를 쌓아 외측(外側)을 더욱 험하게 만들고, 삭평하여 이루어진 성벽 안쪽의 5~20m폭의 평지를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북동쪽의 산봉에 대석과 주초석 및 많은 기와조각이 산재하고 있어 장대지(將臺址)로 추정되며, 남쪽 능선에는 남문지가 있고, 남문지의 20여m 아래에 2중의 토축보루(土築堡壘)를 설치하여 침습해 오는 적을 성 밖에서 차단하도록 하였다. 성안의 곳곳에서 신라와 백제계의 토기편과 고려시대의 토기 자기편 및 와편이 발견되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에 설축된 후 전투를 자주 겪어 소속이 여러차례 바뀌다가 고려대까지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