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신채호(1880~1936)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단재(丹齋),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그가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계가 더욱 기울게 되자 일가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였으며 그 후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서당 교육을 받아 「통감」전질을 해독하고 사서삼경을 독파하는 등 일찍이 신동이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또한 삼국지, 수호지 등의 역사소설을 애독하여 역사에 심취하기도 함으로써 민족주의자로서의 선구적 역할을 다할 수 있는 토대가 조성되었다.
이후 그는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의 제자가 되어 제가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고 20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그 후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에 논설을 쓰고 「독사신론」을 발표하는 한편 국난을 극복한 민족사적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이태리건국 삼결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의 영웅전을 써서 배일사상과 민족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으며 1907년 9월에는 양기탁, 안창호, 이승훈, 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는 등 정치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안악사건을 계기로 신민회가 와해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해조신문」을 발간한 후 상해에서는 신규식이 세운 박달학원의 교사로, 북경에서는 무장적인 독립투쟁과 육탄혈전을 결의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이 되었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분열상에 비애를 느끼고 사직하였으며 한문잡지 「천고」을 발간하여 위임통치 청원을 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과오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여 항일폭력투쟁단체인 의열단의 폭력투쟁의 정당성과 독립항쟁정신을 가장 힘차고도 확고하에 천명하였다. 1924년에는 고구려 유지를 답사한 것을 토대로 「전후삼한고」, 「조선상고사」,「조선사총론」등을 저술하여 단군의 고조선이 민족사적 시원으로서 차지하는 의의와 역할 그리고 발해사를 민족사에 편입시킬 것과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사관을 비판하고 당시 국사 교과서의 왜곡을 비판하였다.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의 입장에서의 폭력혁명을 민족독립운동에 이용할 필요성을 느낀 그는 「민중직접혁명」의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비밀결사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창립하고 그 운동방향을 모색하였다. 1926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대회에서 결의한 폭탄제조소 설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위체를 위조하여 현금으로 교환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여순 감옥에서 향년 57세로 1936년 2월 21일 순국하여 낭성면 귀래리에 묻혔다.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 사관으로 식민주의적 학서를 배격하였으며 항일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도자였고 우리나라 언론의 선국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