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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장기기증 사례 수기 공모전 당선작

청주시 장기기증 사례 수기 공모전 당선작

청주시 장기기증 사례 수기 공모전 당선작

최우수상

청주시 흥덕구에 거주하는 어** 님의 출품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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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나눔

2013년 10월 25일.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유독 티격태격 많이 싸우던 우리 부부는 요즘 신혼부부처럼 사이가 좋다. 어느날처럼 변함없이 남편은 출근을 하고 나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출근을 했다. 직원들과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던중 ..1시가 조금넘은 시간이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호가 왔다.
요점없이 허둥대는 사장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무슨얘기를 하는거지..생각하는순간..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가 부인이다 무슨일이냐..식사를 하다가 쓰러졌고 지금 병원으로 이송중이라는 얘기였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같이있던 직원에게 얘길하고 제일 걱정인 아이부터 챙겼다.아이를 우선 어린이집에서 데리고와 동생집에 맡겼다.
정말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전화가왔다. 충대병원 응급실이다.보호자가 맞느냐..평소에 복용하고있던약이있느냐.상황이 좋지않으니 빨리 병원으로 와라..정말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설마설마하며 정신줄을 잡고 병원에 도착했다..그날 입은 나의 옷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기가막히게 응급실에 들어서니 의사가 기다리고 있다..시선을 조금만 돌렸을뿐인데 저쪽에 나의 남편같은 사람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다..익숙한얼굴..아....못깨어나겠구나..그 생각부터 들었다.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좋지않구나.

신랑곁으로 가니..그제서야 눈물이 났다,아..죽으면 안되는데..이 사람 어쩌지..어떻게 살리지..눈물이 멈추질않았다. 의사는 뇌출혈이 심하고 수술할 수 없는 부위가 터졌고,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말했다.
이일이 있기 한달전쯤 나는 장기기증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전화로 신청을 했는데 나만 신청했는데 서류가 2부가 왔다.저녁을 먹고 작성을 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옆에서 뭐냐고, 자기도 하고 싶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장기기증신청을 했었다. 한달뒤에 이런일이 생길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편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시댁식구들,친정식구들이 면회를 다녀갔다.어머님,아버님이 가장 힘드셨을 것이다
하루에 두 번있는 중환자실면회를 기다리며,조금이라도 의식이 돌아오길바라며 중화자실앞에서 살았다,하루 이틀이 가고 의사가 장기기증의사가 있느냐 그렇다면 진행하셔야 하실것같다.더 이상 지속이 되면 장기가 손상되서 기증할수도 없다는 얘길했다. 시부모님과 함께 얘길들었다.
시어머님은 아들이 다시 깨어나실 것을 기대하시면서 반대하셨다.워낙 건강했던 남편이고,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드셨을 것이다. 또 하루이틀을 의식없는 남편을 면회하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남편을 그냥 의미없이 하늘나라로 보낼것만 같았다. 때마침 어머님이 나를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면 좋겠니..말씀드렸다.우리에게 우리남편이 소중한것처럼 누군가의 가족이 내 남편의 장기로 새 삶을 살수있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이런 귀하고 소중한 나눔이 내아들,어머님의 손자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지에 대해 말씀드렸다.한줌의 재가 될지언정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나누고 갈수있다면 진정한 존귀한 삶이 아닐까?
37년간의 평범한 삶속에서 진정한 최고의 나눔이 아닐까싶다.
장기기증 코디네이터분이 며칠전부터 어떤절차를 통해 장기기증을 하는지 친절히 상담해주고 행여나 가족들이 마음 다치지 않게 신경 쓰시는게 눈에 보였다.
장기기증은 코마상태라고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한번 정말 코마상태인지 의식이 깨어날가능성이 정말 없는지 여러검사를 통해 장기기증이 이루어진다.
가족모두가 받아들이고 남편은 중환자실입원후 8일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1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장기기증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한줌의 재가 될 몸이 누군가에게 큰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인생이 있을까?
남편은 참 자상한 사람이였다.아직도 그의 이름 세글자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태광씨 잘지내지? 아들크는거 잘보구 있지?~
아무걱정도 하지말구 그냥 잘 지켜봐줘~나 힘들 때 한번씩 토닥여주구.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정말 고마웠어.
어머님,아버님 걱정도하지마~당신 대신 좋은며느리 될께
5살이였던 아들은 벌써 16살의 멋진 중학생이 되었고, 아직도 우리는 당신을 많이기억하고 ,많이그리워하고 있어~
당신이 없어도 준식이랑 많이 많이 행복할게 사랑해.
늘 지켜봐줘.

우수상

충북대학교병원에 근무하는 이** 님의 출품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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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빛을 위해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심장내과 전임의인 나는 매일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경험한다. 평생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저마다의 빛을 내며 살아왔을 그분들은 내 앞에서 엇비슷한 모습으로 빛이 바래가신다. 하지만 가끔 잊기 어려운 분들이 있다. 4월 어느 주말, 응급실에 50세 여자 환자가 입원하였다. 집에서 식사하던 중 급작스러운 심정지가 발생하였고, 6분 만에 도착한 119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다시 심장이 스스로의 힘으로 박동하기까지는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관상동맥조영술 결과 진단은 변이형 협심증에 의한 심정지.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경우 원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이 뛰지 않았던 동안 뇌손상이 얼마나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후는 처음부터 희망적이지 않았다. 생체 징후가 불안정했고, 뇌신경이 살아있는 신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혈압을 안정시키고 대사성 산증을 호전시키기 위한 치료를 진행하는 동시에, 추가적인 뇌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저체온 치료를 시작하였다. 이런 단계에서 의사인 내가 보호자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은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뿐이다. 신경학적 예후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72시간이 지나기까지는 보호자도 주치의도 그저 애타게 의식이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만, 이 환자의 경우는 영원히 다시 깨어나지 못 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기까지 7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48시간동안의 저체온 치료를 끝냈고, 몸 상태가 어느정도 안정되었음에도 여전히 동공반사, 대광반사가 없었다. 나는 판단을 마치고 보호자분들이 병원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과정은 내과의사로서 가장 절망적이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심장이 뛰고 혈압이 정상이며 산소포화도가 양호한 환자가 사실상 이미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남편과 딸은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끼고 숨김없이 표현했다. 나는 그들의 절망을 곁에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봐주고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픔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지금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제안, 그러나 의사로서는 반드시 늦지 않게 해야 하는 제안을 해야하는 시간이 온다. 장기기증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정보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호자인 남편분은 오늘은 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날의 면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추가적인 검사가 이루어졌고, 신경과 협진을 통해 뇌사 의심 상태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후 만난 남편분은 기대치 않았던 말씀을 해주셨다. 환자분이 평소에 장기기증에 대한 뜻을 밝히셨다는 것이었다. 남편분은 뇌사가 확실하다면 본인이 다른 가족들을 설득하여 장기기증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남편분의 용기에 감사함을 느끼며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코디네이터분에게 연락을 드렸다. 남편분은 모든 설명을 차분히 들었고, 장기기증을 위해 진행되는 과정에 협조적으로 응해주셨다. 장기 기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뇌사 판정은 각과의 협조를 통해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환자의 상태는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혈압은 조절 중추가 기능을 하지 못하여 매우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급성신부전이 발생하며 소변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눈앞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 환자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환자의 곁을 지켰다. 죽음에 가까워진 환자의 몸에 커다란 투석도관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한 명이 아닌 여럿을 살리기 위한 더욱더 의미 있는 치료라고 생각했다. 결국, 모두의 노력 덕에 장기기증 절차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 환자가 평소 장기기증에 대한 뜻을 확고히 내비치지 않았다면, 남편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본인의 뜻을 얘기하지 않았었다면, 또한 보호자인 남편이 빠른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하나의 꺼져가는 불빛이 다른 빛들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퇴근 후 부인에게 환자와 보호자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서로가 뇌사 상태가 된다면 장기기증을 하자고 약속하였다. 비록 내가 이 세상에서 예기치 못하게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어렵고 숭고한 결정을 내린 환자와 보호자들의 뜻을 따라 세상에 나의 빛을 나누어 주고 떠나고 싶다.


청주시 흥덕구에 거주하는 연** 님의 출품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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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딸은 세상에 남아 있다

2023년 6월 18일 장기, 조직, 안구, 피부. 모든 것을 세상에 남기고 21세 가장 이쁠 때 천사가 되었지요. 제 막내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예쁜 분홍색 우산을 60개, 70개 사준 듯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르는 노인 분들 비 맞고 걸어가시는 것을 보면 우산 던져 주고 비를 쫄닥 맞고 집에 오곤 했죠. 학교 소풍 갔다 집에 오자마자 "엄마, 김밥 꼬랑지 남은거 있나?" 그러길래 "도시락 싸줬잖아! 김밥!" 그랬더니 "다문화 가정 있는데, 검은 봉다리에 과자만 한 개 싸와서 내 김밥 줬지"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소풍 갈 때면 김밥을 4-5개씩 싸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늘 주는 걸 좋아하던 딸이 공부도 어찌나 잘 하던지 올백, 전교 1등 그렇게 언제나 부모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더라구요. 과학고등학교를 거뜬히 입학할 정도로 영재였습니다.

학교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는 천사를 학교 동료들이 발견하고 119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20여일 만에 엄마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천사가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장기기증 관련 수다 떠는 문자 내용을 보았습니다. 친구가 "나는 저승갈 때 앞을 봐야 걸어가지. 그래서 눈은 안돼!" 했더니 제 딸은 "나는 눈이 1빠. 새로운 세상을 다시 보고 있을거야. 그리고 2빠 피부. 이지선교수님처럼 얼굴이 화상이거나 그런분께 피부를 주고싶어..." 그런 내용이더라구요. 포항 성모병원에서 담당과장님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을 때 큰딸이 엄마에게 조심스레 상의하더라구요. "엄마, 효원이라면 모든 걸 기증하는 거. 그게 효원이 마음 아닐까요?" 저도 망설임 없이 "그래. 효원이가 그런 마음일거야." 결정했지요.

워낙 약한 아이고, 119가 심폐소생술하며 동맥도 파열 되고, 모든 장기가 힘든 상태라고 담당 과장님 말씀 하시더. 라구요 주는 걸 좋아하던 천사는 20여일을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가족들 친구들 많은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천사가 되는걸 택하더라구요. 놀라운 건 5월 30일 쓰러져 6월 17일까지 의식도 없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천사가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었고, 트레이너 선생님이 감동이다 이런일 처음이다 하시더라구요. 1년이 지났네요. 첫 번째 기일이 며칠 전 지났습니다. 평소 주는 걸 좋아했던 딸이었기에, 효원이를 기억하고 찾아주는 친구들 지인분들 드시고 또는 들고 가시라고 사탕 초코파이 음료 평소 좋아했던 간식을 잔뜩 비치해 두었더니 바구니에 간식 포장해둔 게 줄어들 때 어떻게 살았기에 지금도 이렇게 많은 친구 지인들이 다녀갈까... 많은분들께 소중한 생명을 다 나눠주고 천사가 된 제 딸이 오늘도 너무도 보고싶네요.

장려상

청주시 청원구에 거주하는 오** 님의 출품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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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준 최상의 선물

나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2006년 8.3일 국립장기이식 관리센터로부터 장기기증 희망 등록증을 수령하였다.
기증형태는 뇌사/사후로 되어 있고 등록기관은 국립의료원으로 되어 있으며 등록 ID는 24****이다.
장기 기증을 한 이유는 우리나라는 장기가 필요한 대기 환자가 너무 많고 의과대학에서 시신해부 공부를 하려고 해도 시신기증자가 없어 실습에 차질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40년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청주 교동초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현재 82세의 할아버지이다
퇴임 후도 국가에서 주는 연금을 받을 수 있어 노후 생활에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온 것을 생각할 때 주변의 많은 사람의 도움과 배려인 것을 깨닫게 되자, 나도 보람이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퇴임 후 바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 이어 오고 있고 죽는 날까지 할 예정이지만 가장 보람을 느끼는 그것은 장기기증이다.
죽은 후 썩어 없어질 필요한 장기를 모두 기증하여 중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후까지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보람이 있고 숭고한 일인가 나는 기꺼이 장기기증 신청을 하여 장기기증 희망 등록증을 받은 것이다.
장기기증서를 받으니 금방 좋은 일을 성취한 것 같아 죽음도 두렵지 않고 미리 사후까지 아름답게 준비를 마련한 것 같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이와 함께 유언장을 만들어 보았다 시신 기증 유언장이다. 내용은 내가 죽으면 바로 충북대학 의과대학으로 후송하여 필요한 장기를 모두 적절하게 이용하고 남은 시신은 의과대학 학생들의 실습용으로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건강한 몸으로 혈액형은 B형으로 조사하지 않고 즉시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라는 유언장으로 지갑에 넣고 다녔다.
나는 시신 기증을 했다고 형님한테 이야기했더니 완고한 형님은 그런 중대한 일을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고 화를 버럭 냈다.
나는 형님을 설득하기를 “만약 형님이 현재의 의술로는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환자로 장기가 시급하고 장기를 이식하지 않으면 그냥 죽어야 하는데 주변에서 뇌사나 교통사고로 죽으면서도 형님을 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장기를 기증하지 않고 그냥 화장을 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까?”
형님은 나의 설득에 점차로 이해하고 동감을 표시했다. 그렇다 장기 이식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이나 화장을 하는 것은 죽은 후에도 후회할 일이다.
죽어서라도 좋은 일을 한다면 그 영혼은 천국을 갈 것이다.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으로 모두 돌아 간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 장기 이식이 필요한 사람한테 이식을 해 준다면 그 생명은 다시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장기기증 희망 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져 퇴임 후 20년 된 지금은 82세 나이이지만 주변의 친구보다 더 활기차게 살고 있다.
나의 몸속의 모든 장기를 온전하게 보전하여 사후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물려 줘야 할 의무감이 있어서 헬스 운동도 열심히 하다보니 실버 보디빌딩 선수가 되어 금년 전국 대회에 출전 특별상도 받았다.
장기기증은 노후를 아름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장기기증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고생하는 사람을 살리고 내가 다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사람을 살리게 되니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생명이 연장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자식들한테 당부하는 말이 있다. 내가 만일 갑자기 뇌사상태가 와서 의사 표시를 못 하면 즉시 충북대학 병원에 연락하여 시신과 장기기증을 하고 주변의 친구나 친척 모든 사람에게는 일절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후에도 생명을 살리는 보람이 있는 장기기증 제도 때문에 죽음도 멋지게 맞이할 수 있고 자식들에게도 전혀 부담이 없는 장기기증 제도가 나에게는 인생 마지막 길에 하나님이 준 최상의 귀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청주시 청원구에 거주하는 신** 님의 출품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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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누에바(Vida Nueva, 새로운 삶)

저는 중학교 2학년입니다.
지난 겨울 방학 때 가족들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정주행했습니다. 저의 최애 드라마가 될 정도로 많이 봤습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 병원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나오는데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드라마 속 의사선생님들의 재미있던 이야기에 같이 박수를 치며 깔깔 웃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 나왔던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죽음 때문에 이별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특히 아기가 아파서 누군가의 심장 이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너무나 다행이도 그 아기는 심장을 이식받아 살게 되었지만 심장을 준 아이는 결국 가족들과 이별을 하게 되었던 그 이야기가 너무 기억에 남습니다. 심장을 내어준 아이는 심장을 받은 아이에게 너무나 큰 선물을 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선물하였고, 아이의 가족들에게도 계속 함께 할 수 있는 행복의 기회를 선물하였으니까요.
저도 엄마, 아빠와 헤어지게 되는 건 너무 싫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순간이 저에게 온다면 저도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은 이미 저에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시간일 것이고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누군가가 장기기증을 해줄 것이라는 희망의 기다림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제가 도움이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고.
하지만 아빠는 반대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미 아픈 딸에게 또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설득했습니다. 옆에서 엄마도 아빠를 같이 설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엄마와 함께 몇 달 전 장기기증을 신청했습니다.
뇌사 시 장기기증과 안구기증을 신청했습니다. 신청한 후 집으로 장기기증 희망등록증이 왔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습니다. 친구들의 반응을 보며 괜히 뿌듯하고 좋았습니다.
저의 이 작은 생각이 저의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다누에바 (Vida Nueva)는 스페인어로 “새로운 삶”을 뜻한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청주시 흥덕구에 거주하는 패트(가명) 님의 출품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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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향한 계획

매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던 든든한 동생이었습니다 우리 두 자매는 같은 학교에 같은 학번으로 입학해 서로의 친구이자 보호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매트는 저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언제나 저를 먼저 생각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단풍이 떨어지던 가을의 선선한 밤이었습니다. 축제 기간이었던 그 때 저는 다리를 다쳐 학교에서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매트는 망설임 없이 저를 업고 캠퍼스를 누비며 강의실과 기숙사로 같이 가 주었고 기숙사 같은 방에 들어와 지내며 생활에 있어서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지금도 학교를 다니다 보면 선명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언니에게 힘을 주는 씩씩했던 매트의 존재는 힘든 학교생활 중 큰 위로와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던 학교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고들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그 중 마지막 사고는 매트를 천사로 데려가 버렸습니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저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20년 넘게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처럼 제 옆에 붙어 저만을 의지하던 매트는 더 이상 제 옆에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매트는 사랑과 희망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매트는 생전에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겠다며 신약 개발을 하는 연구원이 꿈이었습니다. 그런 매트는 종종 장기 기증에 대한 희망과 결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 마음을 존중해 매트가 천사가 되어 결정을 해야 했을 때, 장기기증이라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폐소생술 등으로 약해져 있던 장기들이 보름 넘게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건강한 장기로 회복되었고 기적적으로 여러 생명을 살리는 데 쓰였습니다. 매트는 비록 제 곁을 떠났지만, 그녀의 일부는 여전히 다른 이들의 삶을 살려내고, 또 살아있습니다.

매트를 잃은 후 저는 여전히 정신이 없고, 실감도 나지 않습니다. 학교 곳곳에는 매트와 함께 보냈던 추억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들은 때때로 저를 힘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강의실로 가는 길목, 기숙사 복도와 방 안, 캠퍼스 내 벤치와 잔디밭 등 모든 곳에 매트의 웃음소리와 함께 보냈던 추억이 남아 있었습니다. 때로는 빈 방 침대에 누워 혼자 눈물을 훔쳐야 하기도 했고, 매트의 지인들을 마주칠 때는 괜찮은 척 웃으며 인사해야 했습니다.

저는 매트가 저에게 행운처럼 온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나눠 준 천사같은 존재였고, 저는 매트를 기억하며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고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매트의 부재는 여전히 저에게 큰 아픔이고, 공허함입니다. 특히, 힘들거나 지칠 때 유독 그녀의 예쁜 눈웃음과 따뜻한 위로가 떠오릅니다. 그런 순간마다 저는 매트가 저에게 남겼던 수많은 편지와 그녀의 흔적들을 꺼내 보곤 했습니다. 매트는 저에게 너무나도 큰 사랑을 전해주고 갔습니다. 모든 편지에는 "언니, 내가 언제나 언니 옆에 있어. 사랑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말은 저에게 살아나갈 힘이 되고, 조금 더 버텨낼 수 있는 동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위기 청소년들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매트가 남긴 사랑과 희망을 전하기 위해 관련 공부를 지속하고 있으며 많은 청소년들에게 매트가 보여준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겠다던 매트를 기억하며, 더 많은 청소년들을 살리고 돕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매트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의 중요성을 깨닫고,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매트를 기억하며, 그녀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매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트가 남긴 희망의 씨앗이 자라, 사랑의 나무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부르던 애칭이 '패트와 매트' 였기에, 가명 대신 매트라는 애칭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