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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배우는역사] 금속활자가 꽃피운 조선의 유교 내용, 파일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과학으로배우는역사] 금속활자가 꽃피운 조선의 유교
내용 우리나라는 세계 인쇄문화의 원조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 ‘다 라니경’과 금속활자 인쇄본 서적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 한다. 늦어도 13세기에 시작된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조선시대인 15세기 전반 ‘경자자’와 ‘갑인자’(1434년)의
완성으로 절정에 달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 등 수많은 서적들을 인쇄한 갑인자만 해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보다 20년 정 도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들어 우리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 온다. 1995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 앨 고어는 한 국제회의의
기조연설에서 한국인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으나, 유럽에서와 달리 그것 을 더욱 발전시켜 “한국문화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고어는 그렇게 된 원인으로 한국의 금속활자가 서적의 대중화 내지는 자본주의 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것을 들었다. 현재
필자가 만나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 은 이와 같은 고어의 이해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그러한가? 사실 구텐베르크는 수완이
좋은 자본가이자 기술자로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해 인쇄사업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그의 인쇄기가 초기에 찍어 낸 아이템은
종교개혁이라는 사회 변혁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가톨릭 교회의 재정을 위해 발행한 면죄부였다. 종교개혁가들의 이념이 담긴 팜플렛과 성경 을
인쇄한 것은 그 이후였다. 이렇게 시작된 유럽의 인쇄술은 서적의 폭발적인 간행과 대량 유통을 통한 지 식과 정보의 확산을 불러왔다. 이것은
결국 고전적 지식이 지닌 권위의 몰락을 낳아 소위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가들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유럽사회가 근대화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고 이해한다. 한편 한국의 금속활자는 고려와 조선이라는 중세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즉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녔던 역사적 역할은 중세적이고 권위적인 지식 의 몰락을 통한 근대사회의 도래와 자본주의적 서적의
간행과 대량 보급이 아 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조선이라는 중세 사회의 성숙한 유교문화를 꽃피우는 일이었다. 15세기 조선 정부는 중국에서
들여오는 서적의 대부분을 국가 정책적으로 대 량 인쇄해 널리 보급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하에서 문민정치를 펼쳤던 중앙 정부와 유교 지식으로
무장하면서 빠르게 성장한 새로운 지배 계급인 사대부들 은 금속활자 인쇄본 서적의 가장 큰 공급자이자 넓은 수요자이었다. 조선왕조는 민본적인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넓은 문자 해독층인 사 대부들을 길러내는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럴수록 조선 사회는 학 문과 교양
지식을 겸비한 사대부 지식인층이 지배하는 성숙한 유교 문화를 구 축해 갔던 것이다. 그 중심에 금속활자 인쇄술이 있었다. 결국 한국의
금속활자는 유교적 이상 국가 건설이라는 신생 조선왕조의 역사 적 과제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5세
기 중엽 근대화 과정에 있던 유럽 사회가 요구하던 역사적 역할을 구텐베르크 의 인쇄술이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었던 것처럼, 한국의 금속활자도
역사적 역 할을 톡톡히 다 했던 것이다. 14~15세기 중세 한국의 인쇄술에서 19세기 근대 화 과정의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역사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 木求魚)이다. 〈문중양/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과학사〉
파일 20060602025504710.jpg20060602025504710.jpg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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