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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헌사의 쟁점(1)] ‘조선활자인 전사자’…中·日 넘어 서양까지 닿은 조선활자 내용, 파일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한국문헌사의 쟁점(1)] ‘조선활자인 전사자’…中·日 넘어 서양까지 닿은 조선활자
내용 유럽에서 활자는 혁명이었다. 구텐베르크가 42행짜리 성서 180부를 찍은 1455 년,지식 독점은 무너지고 서구사는 대격변의 첫발을 내디뎠다.
활자는 우리 사 회에서도 같은 역할을 했는가. 불행하게도 답은 부정적이다. 세계 어디에도 조 선만큼 활자 문화가 꽃핀 나라는 없었지만 정보는
여전히 식자층에 독점됐다. 하지만 이 말이 조선 활자의 무용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조선 사회에서 활 자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조선
활자,유교 사회의 기틀을 잡다=조선 활자는 국가의 통치 이념을 세우 고 유교적 가치를 전파한 일등 공신이었다. 초기 왕들은 왕권을 다잡고 통치
규 율을 세우기 위해 법전과 유교 경전을 인쇄해 널리 배포했다. 태조는 집권 후 개국 공신을 치하하는 ‘공신록권’과 법전 ‘대명률’ 등을
간행해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선언했다. 또 ‘예기’ ‘효경’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 등을 통해 충(忠)·효(孝)라는 유교적 도덕관을
전파했고,‘춘추’ ‘통감’ ‘사기’ ‘십칠사 찬고금통요’ 등 역사서를 통해서는 ‘충성한 자는 흥하고 배반한 자는 망한다’ 고 준엄히 경고했다.
조선 중기까지 인쇄물의 대부분은 정부기관인 교서관과 주자소에서 제작됐다. 왕은 법전,역사서,유교 경전,시문집 등을 간행해 왕족과 고관 대신에게
나눠주 고,신하는 군왕의 하사품을 평생 읽고 또 읽었다. 당시 왕들이 인쇄술을 얼마 나 중시했는지는 ‘태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쇄
기술을 개량하기 어렵다 는 대신들의 하소연에 태종이 임무 완수를 독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활자가 통치 수단으로만 활용된 건 아니다.
17∼18세기 인쇄술은 민간에 보급돼 조선 문화의 중심에 선다. 가장 많이 쓰인 곳은 족보와 개인 문집. 족보 는 가문의 뿌리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문집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삶의 목 표로 여긴 조선 지식인들의 존재 확인 방법으로 중요했다. 인쇄물은 뼈대있는 가문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의 후손은 돈을 모아 족보와 문집 을 인쇄물로 제작했다. 활자는 가히 조선 선비 문화의 꽃이었다. 상업 출판물도 활발해졌다.
의서(醫書),농서,달력 등 실용적인 목적의 책은 물 론이고 천자문,사서삼경 등 유교 관련 기본서,소설 등의 수요가 커지면서 인쇄 본들은
시장에서 유통됐다. 18세기 실학의 개화는 이런 활발한 지식 유통을 기 반으로 했다.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금속활자 40여종,목활자 20여종
등 모두 60 여종의 활자가 제작됐고 간행된 책은 1500년까지 계미자 14종,경자자 32종 등 모두 130여종에 이른다.
파일 20060602025454253.jpg20060602025454253.jpg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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