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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헌사의 쟁점 ⑴-1] 인쇄술의 기원과 무구경…흔들리는 활자·인쇄 종주국 지위 내용, 파일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한국문헌사의 쟁점 ⑴-1] 인쇄술의 기원과 무구경…흔들리는 활자·인쇄 종주국 지위
내용 세계가 통합을 부르짖고 있는 21세기. 유독 동북아 3국에선 민족주의가 활개 를 친다. 영토 분쟁과 통상 마찰에,중국의 동북공정이 가세해 이젠
‘역사 전쟁’ 까지 불붙었다. 분쟁은 비단 고대사 분야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니다. 금 속 활자의 발명국인 우리나라는 활자와 문헌의
종주국으로 자부심을 가져왔 다. 하지만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이의를 제기하며 지위는 흔들리고 있다. ‘한 국 문헌사의 쟁점’은 10회에 걸쳐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활자와 고문헌 을 둘러싼 한·중·일 3국의 논쟁을 정리했다. 1966년 석가탑은 몸살을 앓았다. 9월초 도굴꾼의
약탈로 탑신에 금이 갔고 10 월에는 보수 작업 도중 옥개석과 유리 사리함이 부서졌다. 사건은 그런 혼란 중 에 일어났다. 10월 13일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 경(無垢淨光大?羅尼經·이하 무구경)’이 발견된 것이다. 1200 여년 동안 찬 돌 속에
잠들어 있던 국보(國寶)는 그렇게 세상 속으로 나왔다. ‘무구경’의 출현에 일본과 중국 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때까지 알려진 최고 (最古)
목판 인쇄본은 770년 인쇄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百萬塔?羅尼)’. 최 고본 소유국이라고 자부해던 일본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종주국을 공 언해온 중국도 긴장했다. ‘무구경’은 목판 인쇄술의 초기작일 가능성이 커 목 판 인쇄술의 발명국으로서의 지위가 위협받게 됐기
때문이다. 한?중?일 3국 학 자들 사이에 사활을 건 목판 인쇄술 발명국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두루말이 형태의 ‘무구경’은
법장·실차난타·미타산 등이 범어를 한자로 번역한 불경. 가로 641.9㎝,세로 6.5∼6.7㎝,말았을 때 지름 4㎝ 크기로 소형이다. 종이 는
심하게 부식돼 표제와 번역자명,본문 11행 등이 유실된 상태였고 현재 복원 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무구경’은 언제,어디에서
인쇄됐는가=‘무구경’의 번역과 간행 시점,간행지 를 놓고 한·중·일 학자 사이에서 지난 40년 첨예하게 대립돼왔다. 한국 학자들 은 번역
시점을 704년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무구경’ 번역을 ‘천후말년(天后末 年)’으로 기록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을 토대로 했다.
‘천후말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당나라 여황제 무측천의 재위 마지막 해인 704년으로 해석한 것 이다. 반면 중국 학자들은 ‘천후말년’을
‘천후말기’로 보고 701년으로 추정한다. 인쇄된 때는 번역 직후라는 데 양국이 동의하지만 구체적 연도에서는 의견차 가 있다. 한국 학자들은
706년을,중국 학자들은 702년을 유력하게 꼽는다. ‘무 구경’의 맨 끝에 인쇄된 ‘無垢淨光大?羅尼經’의 필법이 경주 황복사지 석탑에 서
발굴된 금동제 사리함 명문(706년)의 탁본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 의 ‘702년설’은 ‘무구경’에 등장하는 이체자(異體字·필획을
바꿔 만든 새로운 한 자)가 증거다. ‘무구경’에 측천무후 통치기에만 사용되다 사후에는 금지된 이체 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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